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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작성일 : 2023-07-31 09:25조회 : 1,489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윤 대통령이 ‘자유민주’ ‘자유민주’ 하고 다니더니 통일원 장차관을 임명하면서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 전략을 추진하라”로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야권이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자 아래와 같은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헌법 4조를 신설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개념이 우리 헌법에 포함된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알려진 9차 개헌에서부터였다. 1972년, 7차 개헌을 통해 우리 헌법에 평화통일 조항이 자리 잡은 이후 5공화국 헌법까지는 대통령의 평화통일 의무를 유지해 왔을 뿐 통일의 추진원칙과 방향에 대해서는 별도의 조항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민주화 이후 여야 합의로 탄생한 헌법에서 비로소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 국가체제에 대한 법적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세력을 자부하는 야당이 '자유민주적'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진다.” (한국일보 7월 25일자. 성기영 ‘다시 짚어보는 대한민국 헌법 4조“)
우리 헌법의 역사를 안다면 이런 주장을 할 수는 없다. 현행 헌법(1987년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 조항은 1987년 개헌 때 처음 들어 간 것이 아니다. 이 조항은 1980년 5공 헌법(전두환 헌법) 제4조와 똑같다.
5공 헌법 제4조의 뿌리는 유신헌법 서문에 있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 -”이란 구절이다. 따라서 유신헌법 서문의 이 구절이 5공 헌법 제4조로 발전해서 현행 헌법 제4조가 된 것이다.
제헌헌법부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영토조항이 있어서 북한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토였다. 그러다가 1972년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조항인 제35조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한다”는 조항을 두었다. 이것이 발전한 것이 5공 헌법 38조 3항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이고, 이것이 그대로 현행 헌법 제66조 3항로 유지됐다.
따라서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의 유래는 1972년 유신 헌법이다. 그러면 왜 유신 헌법에 이런 조항이 들어갔나 하는 의문이 나올 것이다. 유신 헌법의 이 구절은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중정부장인 이후락이 평양에 비밀리에 가서 북한이 상투적으로 떠들어 온 ‘외세를 배격한 자주적 통일’에 합의한 것이 ‘7·4 공동성명’이다. 이 합의를 보고 남북이 연방제 통일을 하는 게 아니냐고 반갑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북의 선전 선동에 놀아난 것이었다. 닉슨 정부가 주한 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는 등 일련의 상황변화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필요 이상으로 과민반응해서 이런 패착(敗着)을 둔 것이다. 당시 총리이던 김종필을 위시한 여권에서도 내부적으로 반대가 많았다. 야당(신민당) 의원 김영삼이 국회에서 김종필 총리에게 그 부분을 날카롭게 질문했듯이 야당도 비판적이었다. 미국 정부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도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1971년 총선에서 한 곳 빼고는 모두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 서울시민들의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종로구와 중구에 살았던 민도 높은 중산층이 특히 그러했다. 서울 사람들은 1963년과 1967년 대선 때 윤보선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6.25 때 북한군 치하에서 90일을 버텨야 했던 서울 사람들은 박정희를 ‘위험한 인물’로 생각했다. 1963년 대선을 앞두고 동아일보는 박정희가 ‘좌익’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윤보선 후보는 이것을 유세에서 강조했다. 그런 기억이 생생한데 외세, 즉 미국을 배제한 자주적 통일을 하겠다고 평양과 합의를 했으니 ‘1963년 대선의 추억’이 새롭게 떠올랐던 것이다.
7·4 공동성명을 ‘유신을 위한 계략’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유신은 그와 무관하게 1971년부터 비밀리에 추진해 왔기 때문에 그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결국 유신헌법 서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이란 구절을 둔 것은 7·4 공동성명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하기 위함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실패가 확정적인 당시는 너나없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했으니 그런 의구심이 나올 만도 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10월 유신’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홍보하면서 가장 많이 강조한 명분이 ‘평화통일’이었다. 하지만 유신 헌법은 장기 집권을 위함이었고 통일은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했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구절은 어디서 나왔나 ? 그 기원은 2차 대전 후에 제정된 독일 헌법(기본법) 제21조 2항이다. 독일 헌법 제21조는 정당의 활동을 보장하면서도 “정당의 활동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die 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를 저해하거나 독일의 존립을 위협하는 경우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조항에 의해 네오 나치당과 공산당이 해산된 바도 있다.
1963년 3공화국 헌법은 이러한 독일 헌법 조항을 들여와서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대법원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대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해산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은 유신 헌법과 5공 헌법을 거쳐 현행 헌법 제8조 3항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 독일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왜 우리 헌법에선 ‘민주적 기본질서’가 됐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3공화국 헌법을 제정할 때 구태여 ‘자유’를 앞에 붙일 필요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식의 인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적 기본질서’는 독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동일하다고 헌법학자들은 보았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 통일’이라는 구절에는 이런 굴곡진 유래가 있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 : 김일성을 만난 이후락, 1972년 7월 4일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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