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느 인문학도가 보내주신 글입니다 (게시판에서)

작성일 : 2008-06-23 00:37조회 : 2,017

자신을 인문학도라고 소개하신 분이 다음의 글을 게시판에 올려 주셨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이곳에도 게재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좋은 글을 주신 인문학도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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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에 몇 글자 적어봅니다.

인문학도 2008-06-23 6

사실 지금 벌어지는 위기는 현 정권의 성향이 보수나 진보냐의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들, 즉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치적 원칙,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토대로 한 경제적 원칙들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국가적 정체성 문제는 싸그리 무시한 채 단순히 '잘 살게 해주겠다'는 주장 하나로 집권한 것이 현 정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문'들이 무력해진 지금 시점에서는 자신들이 활용했던 포퓰리즘의 역풍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상황이겠구요.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재수없게' 보수가 정권의 편에 서 있었던 것뿐입니다.

촛불집회에 나선 시민들은 결코 좌파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들이 좌파세력의 배후선동에 의해 뛰쳐나왔다는 일부 보수 인사들의 해석이 헛다리 짚는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사실은 저들 시민이야말로 '순수하고도 단순한' 보수 세력입니다. 뉴라이트가 일본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헛소리를 역사 교과서에 넣겠다고 말한 것에 분노하고, 국사나 국어마저도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는 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정책에 분노하고, 국민의 건강권마저 포기한 채 굴욕적인 협상을 해놓고선 90점짜리 운운하는 정부에게 분노하고, 보수단체랍시고 성조기를 흔들어대며 방송국 앞에서 가스통에 불을 붙이는 정체불명의 군복 집단에게 분노한 겁니다. 그리고 가장 큰 난관은, 저러한 행위를 벌이는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보수'라 규정하고 시민들을 '좌파'라고 몰아붙인 까닭에, 대부분의 시민들이 저러한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을 '보수'라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교수님께서도 지적하신 바이지만, 촛불집회는 사실상 반환점을 돈 상태라고 판단됩니다. 정부의 졸속 추가협상에도 불구하고 6월 10일에 비한다면 참가하는 인원수는 다소 줄어든 상태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정부가 '제대로 된' 협상안을 이뤄냈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미봉책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집회에 참가하는 시민들에게 '원칙 없는 공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기본적인 통행권마저도 '범죄예방'이라는 이유에서 박탈하고 미란다 고지 없는 불법연행마저 아무렇지 않게 감행하는 현재의 공권력에 대해 시민들은 '신5공시대' '신공안경찰'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민주주의 역행에 대한 책임이 바로 '보수'에게 있다고 시민들이 믿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공권력의 무차별적인 행사를 일부 여당인사와 자칭 보수논객에 해당하는 몇몇 이들이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던 까닭입니다.

지금 보수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있습니다. 어떻게 공권력을 제멋대로 조절해서 현재의 촛불 정국 자체를 어설프게나마 꿰매고 나갈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국민들이 반대하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어떻게든 편법으로 수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수의 방식이 아닙니다. 보수가 지켜야 할 아젠다도 아니고, 보수의 기본적이 정체성과도 어울리지 않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서 현 정권은 보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이비 집단에 불과합니다. 요즘 시민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빌려서 이야기한다면,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잔재와 자기들의 기득권만 생각하는 1%의 정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시민들은 이것이 '보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보수를 자칭하는 이들 스스로가 이러한 정부를 자신의 편이라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촛불집회에 나선 일반 시민들을 적으로 돌려가면서까지 말이죠.

현재의 보수가 정말로 좌파세력의 준동을 막고 진정한 보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민들을 좌파세력으로 몰아가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시민들의 주장이 보수의 정체성과 더욱 잘 들어맞는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대한민국의 상위 1%만을 위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친일 잔재 청산은 커녕 오히려 친일을 받아들이고자 하고, 집회 현장에서 성조기를 흔들면서 미국을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보수'라고 시민들에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러한 가짜 보수들을 정리하고 시민들의 뜻과 연대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라고 과감하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원칙을 지키며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위해서 귀를 기울이는 인물이 스스로를 '보수'라고 지칭하고 나설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사람을 기존의 보수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일은 요원해보입니다. 여전히 시민들은 좌파세력 내지는 폭도로 몰리고 있고, 건강권을 요구하는 당연한 외침이 불법집회로 매도되어 잘못된 공권력 행사 앞에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질주를 누군가가 막지 않으면, 보수는 영영 이들 광기어린 세력과 함께 매장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보수를 가장한 소위 '수구꼴통'을 보수의 손 스스로 솎아내고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마저 놓쳐버리고 한때의 일시적인 기득권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여전히 시민들을 좌파 폭도세력으로 몰고 스스로를 '보수'라고 참칭한다면 대한민국에 진정한 보수가 뿌리를 내릴 기회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지극히 우려스럽습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좌파 세력의 급진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국민의 건강권이 보장되고' '다른 어떤 나라 앞에서도 한 개의 주권국으로 떳떳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바라며 길거리에 나온 것뿐입니다. 어째서 이들이 좌파가 되어야 하고 폭도로 몰려야 합니까? 어째서 대한민국의 보수라고 자칭하는 이들은 이런 시민들의 열망을 자신들의 것으로 끌어안지 못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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