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문학도 님 '현 정권과 보수의 길'(게시판으로부터)

작성일 : 2008-06-24 01:18조회 : 2,166

인문학도 님께서 좋은 글을 또 올려 주셔서 보다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도록 여기에 올립니다. 특히 요즘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후반부를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합니다. 촛불 집회에 그렇게 많은 청소년이 참가하게 된 원인을 풀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듯합니다.
저는 평소부터 우리나라의 논술 공부가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논술은 일종의 열린 교육이지요. 우리 세대가 했던 공부 , 즉 지식을 섭취하고 이해하는 공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세대는 아는 것은 많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약했습니다. 사실 제가 촛불에서 놀란 것은, 젊은 세대가 그렇게 집단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소 길지만 인내심을 가지시고 일독을 하시기를 권합니다..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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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정책과 현 정권, 그리고 보수의 길

인문학도 2008-06-23

어쩌다 보니 제가 지껄여놓은 글이 이동되었군요. 괜히 송구스럽습니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글 괜찮게 봐주셔서 일단 감사드린다는 말 적어두고 시작합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야 이미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사안이므로 대한민국에서 실제 보수의 여부를 판가름하게 해주는 것은 어떠한 대북 정책과 기조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선생님의 의견이신 듯합니다. 이러한 '기준' 설정에 대해서는 저 역시 공감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특수성 하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리트머스액은 아무래도 '북한'이라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현 정권은 보수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서 지난 노무현 정권 역시 '좌파'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어색한 면이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적국을 상대하는 방책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 가장 하책은 상대국과 직접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요, 중책은 외교적인 계략을 통해 상대국을 고립시키는 것이요, 상책은 상대국의 전쟁 수행의지 자체를 꺾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대한민국에서 '보수'의 여부를 판가름하게 만드는 북한에 대한 태도가 향후 남한 주도에 의해 남북 분단상황을 발전적으로 해소시키는 데 있다고 한다면, 그 최선의 방책은 북한으로 하여금 어떠한 적대적 행위도 수행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밑에 어떤 분도 지적한 사항입니다만,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상의 우위를 이용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제 발로 기어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동시에, 혹시라도 엉뚱한 행동을 벌이지 않도록 외교나 국방 부분에 방비를 탄탄히 하는 것이 기본적인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 정권의 대북정책은 오히려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라고 봅니다. 나름대로 비핵개방3000이네 뭐네 하면서 대북 정책에 대한 '강경기조'를 내세우고는 있습니다만, 그 실질적인 운용에 있어서는 강경은 커녕 불쏘시개로 찌르는 짓만 하고 있습니다. 외교적인 측면만을 보더라도 북한의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인 연계조차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대북 강경책만 내세우다보니 오히려 북한이 미국과 직접 협상에 나서게 만드는 웃지 못할 결과만 낳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대북 문제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이 항상 주도권을 잡아야 할 것인데, 주도권은 커녕 당사국의 위치마저 빼앗겨버렸으니 이러한 실속 없는 강경책이 과연 강경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대북 문제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입으로만 외치는 강경책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북한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실력'상의 강경책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방력 강화가 필수겠지요. 여태까지의 남북 대치 양상은 주로 병력 증강 위주의 양적 대립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런 결과로 이 좁은 땅떵어리에 남북 공히 160만의 병력이 대립하고 있는 결과를 낳았죠.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첨단화, 기계화되어가는 현대 전장에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대치 양상을 해소하고 북한보다 군사력 상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군의 현대화, 즉 첨단 기술과 무기의 도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특히 북한으로서는 제대로 된 양성이 불가능한 해군력이나 공군력에 대한 투자와 기술 개발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보수'를 자칭하는 이명박 정권은 이러한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대우조선을 매각하겠다는 발상부터가 그러합니다. 대우조선이 어딥니까? 대한민국 해군의 척추 역할을 하는 장보고급 잠수함 8척을 건조한 곳입니다. 해군력 가운데서도 첨단 기술의 꽃인 잠수함 건조 기술을 단지 '돈'이라는 이유 때문에 매각한다는 것, 그것도 해외에 매각하겠다는 발상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역시 '경제성'이라는 것을 이유로 육군의 AH-X사업을 백지화시켰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미육군의 아파치 헬기를 중고로 도입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장의 시각에서 보자면 아파치를 구매하는 편이 경제적으로나 전력 유지상으로나 이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체적인 항공기 개발을 통해 얻는 노하우와 기술의 축적이라는 것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국방력을 지탱해나갈 버팀목이 될 지점들을 단지 '돈'을 이유로 뿌리채 뽑아내버리겠다는 발상이 어찌 국방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으며, 대북 강경책을 지탱할 수 있으며, 보수의 사고방식이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최고의 '블랙코미디'는 역시 성남기지 이전의 문제가 되겠네요. 제2롯데월드를 세운다는 이유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은 성남기지의 이전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성남기지가 어떤 곳입니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자체적인 대북 감시가 가능한 무인정찰기 전력을 운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성남기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8군의 정보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자체적으로 대북 감시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야 그냥 활주로 이전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지만, 활주로가 아무데나 닦을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정찰기의 항속거리 문제 등을 고려한다면 성남기지가 사실상 유일한 대안인데 말이죠. 우파고 좌파고를 떠나서 대한민국 국군의 수반이라는 자가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서 기지 이전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이러한 정책의 '내용'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권의 대북정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이러한 시선 내에서 규정되는 대한민국 '보수'의 양상입니다.

작성자란에도 썼지만, 저는 인문학을 전공하는 20대 대학원생에 불과합니다. 저 같은 비전문가마저 저런 정보들을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고,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현 정부의 정책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어렵잖게 논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진정한 '보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상의 생계 유지(?)를 위해 학생들을 상대로 논술 수업을 합니다. 요즘에야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죠. 주로 고1이나 중3 학생들을 가르칩니다만, 논술의 성격상 주로 시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수업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어떠한 주제를 던져주면, 이 학생들이 그 다음 시간에 자료를 조사해서 글을 쓰고 발표하는 수준이 장난이 아닙니다. 제가 위에서 쓴 내용의 상당수도 학생들이 '조사'하고 '발표'한 내용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르신들이 생각하시기에는 마냥 철없고 어리게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저도 당해내기 힘들 만큼의 날카로운 질문이나 비판을 던지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중3짜리 학생의 입에서 '첨단 방위산업체는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것을 경제 논리에 근거해서 매각하겠다는 발상은 매국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요즘 학생들의 수준입니다.

문제는 이런 정도의 지적 수준과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는 '어린' 학생들마저 이러한 현상을 '보수'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위산업체를 매각하는 것도 보수고,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오는 것도 보수고, 역사 교과서를 개편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입시키겠다는 것도 보수의 주장이라는 게 학생들의 인식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성남기지 이전을 주장했고, 대통령이 앞장서서 - 그것도 삼일절에 - 일본과의 과거는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말했고,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값싸고 질좋은 미국산 쇠고기를 제공할 수 있게 되어서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자칭 '보수'라고 하는 지식인과 언론사, 시민단체들이 이러한 대통령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섰으니 학생들은 당연히 이를 보수의 '책동'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요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보수에 대한 증오'는 무섭습니다. 말 그대로 감히 '증오'라고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입니다.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조중동은 찌라시"(선생님께는 송구스럽습니다만), "한나라당은 매국노", "뉴라이트는 친일파", 심지어는 한나라당을 '딴나라당'이나 '개나라당'으로 바꿔 부르거나, 뉴라이트를 '뉴또라이' 내지는 '또라이트'라고 비꼬아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이러한 것들의 총합이 곧 '보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보수를 싸잡아서 증오합니다. 이러한 학생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고 유권자가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대한민국 보수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아무리 진정한 보수에의 뜻을 품고 보수 혁신을 외치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다 해도, 이러한 증오의 해일 앞에서 과연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일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암담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제가 가르치던 학생이 가지고 온 책자를 봤습니다. 재향군인회에서 일선 초등학교에 배포한 책자라고 하는데, 주로 반공에 관련된 내용을 만화로 담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취지야 어쨌든간에,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 내에 욕설이나 과격한 표현 등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중학생만 되어도 이미 골드만삭스가 이명박 대통령 조카의 회사라는 것을 알고, 대우조선을 골드만삭스에 매각하려는 게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냐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이런 요즘 학생들의 수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자를 배포하는 '보수'의 모습이라는 게 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더군요.

이명박 대통령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눈높이'라는 걸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일반 시민이 되었든, 중고등학생이 되었든, 오늘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 수준이라는 것은 현재 '보수'임을 자칭하는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이 생각하는 그 눈높이가 아닙니다. 모 방송국의 시사프로그램을 보니까 어떤 여고생이 쇠고기 수입 문제에 대해 탄원 메일을 보낸 것에 대해서 어떤 국회의원 분이 "이것은 고등학생이 쓴 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라며 답장을 보내셨더군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불과 100년 전의 만민공동회에서도 12세의 어린 소년이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자 모든 사람들이 감격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님에도, 미리 도맷금쳐서 상대방의 지적 수준을 규정해버리고 이에 따라 소위 '문화정책'을 준비하는 오늘날 대한민국 보수의 모습이 어린 학생들의 시선에조차 곱게 비칠 리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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