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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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논술교육과 보수의 미래 (게시판에서)
작성일 : 2008-06-24 18:11조회 : 2,122
게시판
논술 교육과 보수의 미래
인문학도 2008-06-24
선생님께서 제 글 옮기시면서 앞에 짤막하게 달아놓으신 글을 보니까, 아마도 현행 논술교육의 성격이 지금 학생들의 행동 양상이나 사고 방식을 규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고, 현장에서 논술 지도를 하고 있는 입장이기에 이에 대해 좀 더 세부적으로 적어볼까 합니다.
일단 요즘 학생들은 특정 지식에 대한 깊은 이해나 특정 기술에 대한 숙련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전 세대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어떤 것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거나 암기하는 일에 익숙치 않으며, 주어진 지식을 수용하는 일에는 둔감한 편입니다.
대신 자기 주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매우 숙달되어 있습니다. 7차교육과정 이후 그러한 방식의 교육을 학교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하기도 했고, 요즈음의 대학입시나 입사시험 등에서 심층면접이나 토론 형태의 구술시험이 세분화/정밀화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요즘의 학생들에게는 수많은 언로(言路)가 열려있다는 것이 가장 핵심이 되겠죠.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학생들은 얼마든지 자기 의견을 남에게 말할 수 있고, 또 자연스럽게 다른 이와의 토론을 통해서 자기 의견을 조정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를 조합하거나 정리하여 이를 자기 주장의 '재료'로 쓰는 일에는 무척 능숙합니다. 반농담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제가 학부생이던 시절에 비해서 레포트 짜집기하는 능력마저도 수십 배 가량 향상되었을 정도입니다. (물론, 그래봐야 채점하다 보면 짜깁기 했다는 심적 증거는 늘상 발견됩니다만...)
아마도 이러한 교육 및 인터넷 환경이 요즈음의 학생들을 과감히 길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든 요인이 아닌가 합니다. 게다가 이 학생들은 지난 2002년과 2006년의 경험마저 가지고 있습니다. 8~90년대 학번들에게 길거리가 최루탄과 화염병의 공간이었다면, 2000년대 중반 이후의 학번들에게는 축제와 함성의 공간입니다. 거리낌이 없다는 거죠. 자기가 말하고 싶으면 길거리에 나가서 당당하게 외치겠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잘해야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교육받은 아이들이고, 누가 더 그런 것을 잘하느냐를 가지고서 서로 경쟁 비슷이 여기기까지 하는 게 요즘 아이들입니다. 그렇게 단체로 몰려나와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구호를 외치고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전혀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일종의 '축제'나 '게임'으로 여기죠. 그리고 '게임'이기에 즐기면서도 질 수 없다는 일종의 오기가 작동합니다. 자기들은 하고 싶은 말 하려고 나왔는데 왜 막느냐 이거죠. 그러다보니 공권력 앞에서도 당당해집니다.
문제는 이런 '태도'를 취하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내용'이 교육되느냐의 여부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의 근원이 되는 지점에 바로 현행 논술 교육이 있는 것이겠구요.
사실 대부분의 논술 교육 현장에 진출해 있는 사람들은 8~90년대에 사회과학을 전공했던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소위 '운동권' 내지는 '좌파'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기술적인 원인이 있는데, 일단 소위 8~90년대에 사회과학을 전공하며 운동권 노릇을 하던 인사들의 속성상 아무래도 '토론'이나 '발표'라는 기술에 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논술에 대비하는 데 사용되는 서적들의 상당수가 좌파적 성향을 지닌 것들, 혹은 기존의 좌파 계열 서적들을 변형시켜 풀어서 쓴 서적들이 대다수라는 점이 작용합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닌 비좌파적(?)인 학생들이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얻어서 사회로 진출한 반면에, 이들 운동권 출신 중 상당수는 다소 불안정한 학원강사 등으로 편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인문계열 출신들은 아무래도 논술학원 쪽으로 유입되는 경우가 대다수지요. 7차교육과정 이후 논술이 대폭 강조되면서 논술 학원 시장이 급격하게 확산된 덕분에 단기간 내에 논술학원 강사로 편입되어 들어간 이들이 많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논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좌편향적인 사고를 드러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실생활에서까지 그러한 경향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논술 답안을 작성하는 경우에는 그런 일이 꽤 빈번하게 벌어진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A라는 논제에 대해 가)라는 선택지와 나)라는 선택지가 있을 때, 학생들이 주로 선택하는 것이 나)라고 한다면 이 나)의 내용은 비교적 좌편향적 성격을 드러내는 주장인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논술학원에서 늘상 수행하는 독서 과제나 독서 토론 등을 통해서 접하는 서적들의 경향이라든가, 시사문제 토론이나 논술 답안 해제 등에서 강사분들이 주는 영향 등을 고려했을 때 어느 정도 좌편향성을 띨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지난 5월이었던가요, 매경에서 주최했던 고등학교 논술경시대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인문계열 고3 문제로 나왔던 내용이 인천공항의 귀빈실 서비스에 대한 논란을 바탕으로 해서 사회 양극화 현상과 부의 재분배 문제에 대한 것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채점에 참여했었는데, 그 때 받았던 문제지가 남아있는지 알 수 없어서 정확한 내용을 적지 못하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보통 논술 채점 이전에 문제지가 주어지면 강사들끼리 반 농담식으로 하는 이야기들 중 하나가 "야 이번 꺼 좀 빨간데?"와 같은 것인데, 그런 대화에 적용하여 생각해본다면 비교적 '빨간 편'에 속하는 문제였죠. 나름대로 보수색을 띠고 있다는 경제지에서 주관하는 시험조차도 그러합니다. 물론, 논술 교육의 담당층을 볼작시면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요.
사실 이 영역에서 진보좌파가 구축하고 있는 라인은 꽤 두텁습니다. 일단 꽤 유명한 논술 학원의 원장급 라인부터가 사회과학을 전공하면서 좌파 계열 지식에 공명했던 인물들인 경우가 많고, 이러한 원장 밑으로 들어가는 강사들도 대학 시절에 운동권에 참여했던 경우가 꽤 됩니다. 말하자면 대학 내에서 사회과학 학회나 학생회 등을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좌파계열 라인이 논술학원계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셈이죠. 여기에 이전에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다시피, 요즘 학생들에게 읽힐만한 지식 관련 서적의 대다수가 주로 좌파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도 크게 한 몫 합니다.
지금 10대 학생들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마주치는 좌파 계열 시민단체나 노조원 등에 대해서도 별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는지 모릅니다. 자기들이 늘상 마주대하던 논술 선생님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생각으로,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게다가 '쇠고기 수입 반대'라든가 '교육자율화정책 반대'와 같은 의제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으니 더욱 연대감을 느꼈을지 모를 일입니다. 오죽하면 어떤 여고생이 금속노조 - 상당한 강성노조에 속하는 - 간부들에게 '왜 빨리 파업에 나서지 않느냐'며 선동 연설을 해서 해당 간부들이 뻘쭘해했더라는 후일담(?)까지 들려오고 있을 정도니 말이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스로를 '보수'라고 자칭하는 분들은 이러한 10대들의 반란을 선동질 당한 철없는 아이들의 불장난처럼 규정해버렸으니 학생들의 상대적인 반감은 더욱 컸을 겁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바는 이렇습니다. 학생들이 큰 불편함없이 접근할 수 있고, 비교적 피부에 와 닿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보수 성향의 서적들이 과소한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적들을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이러한 것들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교사들의 부재 역시 큰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학생들이 좌편향적이 된다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좌파적인 것이 되었든 우파적인 것이 되었든 다양한 논리와 사상을 접하고 그 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비교적 부합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하는데, 현재의 교육 현장 상황에서는 그러한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부터 차근차근히 밟아나가서 자연스럽게 보수우파적인 사고를 접하고 여기에 접목할 수 있는 토대들이 마련되어 있어야 할텐데, 그런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어차피 만시지탄이긴 하겠지만, 만일 뉴라이트가 처음 발족하던 당시의 목표를 놓치지 않고 대학생들에 대한 '문화교양' 사업에 주력했더라면 이 부분에 대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대학 내에서 교양을 쌓은 친구들이 나중에 졸업한 뒤에 교육계로도 나갈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뉴라이트는 대학생들에 대한 직접적인 문화 접촉보다는 외려 비운동권 총학생회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했고 - 이 부분은 제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긴 합니다만, 아직까지 대학원에 남아있는 입장에서 보이는 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 이런 선택은 오히려 일반 대학생들과의 접촉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시켜버리는 역효과를 낳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게다가 친일로 비춰질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역사교과서 개편을 주장했다거나, 이번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국민들의 사고에 거스르는 주장을 펼쳤다는 점에서 이제 일반 대학생들과 접목할 수 있는 기회는 요원해져버렸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적다보니 또다시 쓸데없이 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즘 이래저래 어지러운 일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말이 많아지는군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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