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Guardian Democracy

작성일 : 2022-09-08 11:39조회 : 722

Guardian Democracy

20대 국회 개헌 특위 위원을 지낼 때 나는 정부 구조를 다루는 분과에서 속해 있었다. 정부 구조 등 여러 문제를 논의했는데, 국회의 입법권을 다룰 때였다. 몇몇 의원들이 일반국민이 입법안을 발의해서 국민투표로 확정시킬 수 있는 국민발안(發案)제 도입을 주장했다. 나는 거기에 반대했다. 내가 볼 때 놀라운 점은 이런 주장을 의원들이 한다는 사실이었다. 의원들이 자기들을 스스로를 깎아 내려야 민주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왜 국회의원을 하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캘리포니아의 주민발안제인 프로포지션(Proposition)을 들어서 그런 제도가 순기능 못지않게 역기능이 많다고 지적했다. 캘리포니아의 프로포지션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던 의원은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내가 몇 차례 문제 제기를 해서 더 이상 진전 되지는 않았다. 사법부를 다룰 때에도 어느 의원이 독일처럼 추상적 위헌심사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해서 내가 한 마디 했다. 추상적 위헌심사는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구체적 위헌심사와 달리 구체적 사건이 법원에서 제기되지 않더라고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 헌법재판소에 제소하면 헌법재판소가 해당 법률 조항을 위헌으로 판결할 수 있는 제도다.

1987년 개헌 때 예상과는 달리 헌법소원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에다 추상적 위헌심사제를 도입하면 국회가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서명해서 제정된 법률은 법률 초안 밖에 안 되고 헌법재판소에 의해 합헌으로 판결이 나야 제대로 된 법률이 될 우려가 많다. 물론 국회를 통과하는 법률안 중에는 엉망인 것도 많고 위헌 의심이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의원들은 법률안을 만들 때 그런 결과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적당히 법률안을 통과시키고 그것을 헌법재판소로 보내서 위헌 여부를 가리도록 하자고 의원이 주장하면 도무지 의원을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의원이 스스로 국회의 권능을 깎아 내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발언을 해서 더 이상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분과회의 속기록에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대의민주주의이다. 정부 기관 중 가장 민주적인 기관은 물론 의회이고 의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의원들 자신이 이런 인식이 부족하다. 의원들이 스스로 토론을 거쳐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극단적 열성당원들이 좌우하기 쉬운 전당원투표에 의존하거나 당 지도부라는 최고회의의 알량한 결정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도 역시 마찬가지다. 의원들이 자존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의원들은 지역구의 이해관계와 지역 여론에 좌우되기 쉽고, 또 그런 이유로 포퓰리즘에 편승한 다수지배의 독재를 초래할 우려도 있다, 그래서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과 위헌법률심사 제도를 두는 것이고, 미국 같은 양원제 국가에선 포퓰리즘에 좌우되기 쉬운 하원을 상원이 견제한다. 의회가 제 구실을 못하면 사법부의 개입을 초래하는 수가 있는데, 사법부는 사건이 발생하면 거기에 대해 재판을 하는 기관이고, 또한 3부(府) 중에서 유일하게 민주적 절차인 선거에 의해서 구성되지 않는 기관이라는 나름대로의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사법부가 규범을 창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래된 헌법 철학이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 대법원은 흑백 인종분리, 형사피고인/피의자의 권리 등 기본권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판결을 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Baker v. Carr 사건에서 선거구 인구평등 문제도 사법부가 심리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지역구 의원들의 기득권 지키기 때문에 인구변동에 따른 선거구 획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연방법원에 의해 의회가 선거구를 재(再)획정하게 된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해선 그것이 사법부의 영역을 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대법원은 Wesberry v. Sanders (1964) 판결을 통해 하원에게 인구에 비례한 지역구를 설정하라고 판시했다. 같은 해 Reynolds v. Sims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주 상원도 인구에 비례해서 지역구를 설정하라고 판시했다. 주 의회는 인구에 비례한 지역구로 구성된 하원과 행정구역 단위로 의원을 선출하는 상원으로 구성되어 왔는데, 주 상원도 인구에 비례해서 구성하라고 대법원이 명령을 한 것이다. 연방국가인 미국의 하원은 인구 비례로 구성하되 상원은 모든 주가 상원의원을 2명씩 선출하도록 했는데, 그러한 양원제 원칙이 주 의회에선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한 것이다.

대법원이 의회의 구성 원리에 개입한데 대해서는 비판과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유권자의 권리에 관한 것이라서 긍정적인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의회가 스스로 할 일을 하지 못해서 사법부가 개입한 것인데, 이런 경향이 대의민주주의를 취약하게 만들 것이라는 비판도 일었다. 투표권 논쟁의 역사를 연구한 워드 엘리옷이란 젊은 정치학자는 이를 두고 미국이 ‘후견 민주주의’(Guardian Democracy)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엘리옷 교수가 말한 ‘후견 민주주의’는 낙태 자유화 판결인 Roe v. Wade(1973년)에서 클라이맥스를 찍었다. 대법원은 임신 기간을 3등분해서 낙태 자유, 제한적 자유, 원칙적 금지를 명령했다. 사법부가 사실상 입법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수십년 동안 낙태를 둘러싼 입법 과정이 더욱더 혼란에 빠져들자 대법원은 지난 6월 Roe v. Wade 판결을 폐기해버렸다. 낙태는 자유화도 자유화 폐기도 모두 대법원이란 후견인(Guardians)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아래 책 <The Rise of Guardian Democracy>은 1974년에 나왔는데, 저자 Ward E.Y. Elliott는 버지니아 로스쿨을 나오고 하버드에서 정치학 박사를 했다. 캘리포니아 클레어먼트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오래하고 은퇴했다. 나는 이 책을 유학가기 전에 국내에서 읽었다. 당시 나는 민주과정과 사법부의 역할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오래 된 책에 관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국민의힘 지도부에 대한 지방법원의 가처분 판결 때문이기도 하다. 정당의 의사 결정, 그것도 의사결정의 절차도 아닌 실질적 내용을 법원이 심사해서 가처분 결정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법권의 남용이고 월권이다. 판사 한 명이 정당의 후견인(Guardian)을 자처하고 ‘정치적 덤불’(political thicket)로 뛰어 든 꼴이다. 덤불로 들어가면 움직일수록 상처가 나고 온전하게 빠져 나오기가 어렵다.

미국에서 사법부가 정치과정에 개입했다고 해서 논란이 많았던 선거구 획정 문제는 유권자의 시민적 권리가 개입된 것이라서 정당 내부 의사결정을 문제 삼아 가처분이란 극약처방을 내린 우리의 경우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정당은 기본적으로 자발적 단체라서 그 내부적 의사결정을 사법부가 일일이 심사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물론 이런 꼴을 야기한데는 의원들 스스로가 자존심을 상실한 것도 기여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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