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리차드 헬름스 (1)

작성일 : 2022-09-18 11:22조회 : 792

리차드 헬름스 (1)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국가안보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면서 FBI가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CIA에 지시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워터게이트 사무실 침입 사건이 있은 후 6일 후인 1972년 6월 23일에 참모들에게 이렇게 지시한 내용이 녹음 테이프에 남아서 닉슨 대통령이 불법을 은폐하기 위해 CIA를 동원하려 했음이 드러나자 탄핵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가 높아졌던 것이다.

닉슨 대통령은 CIA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CIA는 태생부터 예일, 프린스턴 등 동부의 명문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계층이 이끌어 왔는데, 닉슨은 그런 엘리트를 케네디를 지지하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닉슨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CIA가 은연 중 케네디를 지지했다고 믿었다. 대통령 취임 후 닉슨은 리차드 헬름스 CIA 국장을 경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닉슨은 CIA 국장이 대통령에 직접 보고하지 말고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을 통해 보고하도록 했다. CIA 역사상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1966년에 CIA 국장이 된 리차드 헬름스(Richard M. Helms 1913~2002)는 CIA의 전신인 OSS 시절부터 계속해서 주로 정보수집과 기획 분야에서 일해왔고 부국장을 거쳐서 국장 자리에 올랐다.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헬름스는 스위스의 유명한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독어와 불어를 배웠고, 유서 깊은 윌리엄스 대학을 졸업했다. UP 기자로 베를린에서 나치 독일을 현지에서 취재했고 전쟁이 닥쳐오자 귀국해서 해군에 입대했다. 정보장교로 차출된 그는 OSS 스위스 지부로 배치되어서 앨런 덜레스 아래서 일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고 앨런 덜레스가 CIA 국장이 되자 헬름스는 정보수집과 기획 그리고 비밀작전 분야에서 일했다. 헬름스는 존슨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서 국장이 됐다. 이처럼 헬름스는 1950년대와 60년대 그리고 70년대 초에 이르는 치열한 동서 냉전 기간 중 CIA의 정보 수집과 기획 및 공작 책임자로서 그리고 국장으로서 보이지 않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닉슨은 대통령 임기 초인 1969년 3월 CIA 본부를 방문했다. CIA 직원들은 대통령의 방문을 환영했지만 닉슨과 헬름스와의 대화는 냉랭했던 것으로 나중에 확인됐다. 그 해 6월, 닉슨 대통령은 당시 반전(反戰) 시위와 블랙 팬더 등 급진적 폭력단체의 배후에 미국에 적대적인 외국 정부의 개입이 있는지에 대한 CIA의 견해를 묻는 서신을 헬름스 국장에게 보냈다. 헬름스 국장은 반전 시위 등 소요 사태는 국내에서 발생한 것이고 그 배후에 외국 세력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는 보고서를 백악관에 보냈다. 헬름스는 또한 국내 사찰은 CIA의 권한이 아니라고 답변을 보냈다.

반전 시위의 배후에는 해외 공산세력이 있다고 생각한 닉슨은 이 같은 CIA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닉슨은 나이가 많고 건강이 나쁜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서 반전시위가 거세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후버 국장을 경질할 수는 없었고 그가 빨리 죽기만을 기다렸다. 후버는 1972년 5월 2일에 사망했고, 닉슨은 법무부에서 비교적 한직을 맡고 있던 패트릭 그레이(L. Patrick Gray 1916~2005)를 후임 국장으로 지명했다. 해군 잠수함 장교 출신인 그레이는 FBI를 알지 못했고 수사 경험도 없었다. 여기에 대해 자기가 FBI 국장이 될 줄 알았던 FBI 부국장 마크 펠트(Mark Felt 1913~2008)는 큰 배신감을 느끼며, 결국 그는 워터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을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Bob Woodward 1943~) 기자에게 은밀하게 알려주게 된다. 따라서 펠트가 워터게이트의 진실을 언론이 알린 것이 과연 순수한 의도였느냐에 대해선 비판적인 시각도 많다.

닉슨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피그스 만 침공과 케네디 암살 간의 관련성 등 케네디 암살의 배후에 대해 궁금해 했다. 대통령이 된 닉슨은 헬름스 국장에게 케네디 암살에 대해 CIA가 갖고 있는 자료를 백악관에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헬름스 국장은 이런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 백악관과 CIA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았고, 헬름스 국장이 닉슨을 낮추어 본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은 헬름스 국장과의 관계가 좋았는데, 소련과 핵무기 감축협상 등을 진행하는 키신저는 CIA의 정보 분석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 사진 (1)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을 만나서 논의를 하는 헬름스 CIA 국장 (1967년 또는 1968년). 헬름스는 존슨 대통령과 사이가 좋았다 : (2) 1969년 3월 CIA 본부에 헬기로 도착한 닉슨 대통령을 맞이하는 헬름스 국장.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만났지만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냉랭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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