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리차드 헬름스 (2)

작성일 : 2022-09-18 11:32조회 : 761

리차드 헬름스 (2)

1972년 6월 17일 자정이 넘어서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리차드 헬름스에게 CIA 간부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방금 CIA 직원이던 제임스 맥코드와 다른 네 명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됐으며, 하워드 헌트도 연루되어 있는 것 같다고 보고를 한 것이다. 헬름스 국장은 CIA의 해외 공작 파트에서 오랫동안 일한 하워드 헌트를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은퇴 후 백악관에서 일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헬름스 국장은 이 사건의 배후가 백악관일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민주당 전국위원회 같은 중요하지 않은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간부회의에서 헬름스 국장은 CIA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확인하고 추이를 잘 살피라고 지시했다.

6월 23일, 백악관 존 얼릭먼(John Ehrlichman 1925~1999) 보좌관이 CIA 부국장인 버논 월터스(Vernon Walters 1917~2002)에게 백악관으로 들어오라고 호출했다. 헬름스 국장은 월터스에게 아무 것도 약속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월터스 부국장을 만난 얼릭먼은 워터게이트 사건은 국가안보가 걸려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CIA가 FBI에게 수사를 중단하라고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월터스 부국장은 그것은 CIA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며칠 후 30세 밖에 안 된 백악관 법률비서관 존 딘(John Dean 1938~)이 2차 대전에 참전한 예비역 중장이며 고위 외교관직을 역임한 월터스 부국장에게 다시 백악관으로 오라고 호출했다. 존 딘이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체포된 사람들이 백악관과 관련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월터스 부국장은 FBI의 수사가 CIA의 활동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 다음 날 존 딘은 월터스를 또 다시 호출했다. 딘은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받아야 할 급여를 CIA가 지급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월터스는 헬름스 국장과 의논해야 한다고 답했고 헬름스는 불가능하다고 끊어버렸다. (버논 월터스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유엔 주재 대사를 지내고 부시 행정부에서 주 서독 대사를 지내면서 독일 통일 과정에 간여하게 된다.)

문제는 월터스 부국장에게 이야기한 내용이 단순히 존 얼릭먼이나 존 딘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이런 내용을 닉슨은 이들과 의논하고 닉슨의 지시에 따라 이들이 월터스 부국장에게 물어 본 것이었다. 그리고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눈 이 대화는 자동으로 녹음이 되었고, 나중에 녹음 테이프가 있음이 드러났으며 법원은 백악관이 테이프 제출을 거부할 수 없다고 해서 결국 이런 은폐 모의를 한 대화가 공개된 것이다. 닉슨의 사임을 불러온 결정적인 녹음 대화(‘Smoking Gun’)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 때문에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소강상태를 맞게 된다. 11월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가 끝난 후 닉슨은 몇몇 각료를 교체해서 2기 행정부를 발족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닉슨은 헬름스 국장에게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헬기편으로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했다. 오직 밥 홀드먼 비서실장만 배석을 해서 홀드먼이 나중에 펴낸 회고록을 통해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알려지게 됐다.

닉슨은 헬름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다음 계획을 갖고 있냐고 물었다. CIA 국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고 있던 헬름스는 “이듬해 3월이면 60세 은퇴 연령이기 때문에 그 때 물러나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닉슨은 “소련 주재 대사로 나가겠냐?”고 물었다. 헬름스는 “CIA 국장을 지낸 사람을 소련 주재 대사로 보내는 것은 양국 관계에 부정적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닉슨은 머뭇거리더니 “대사로 나가고 싶은 나라가 있냐?”고 물었다. 헬름스는 “이란 주재 대사로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닉슨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악수를 청해서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각자 헬기를 탔다.

헬름스는 1973년 2월 2일자로 CIA 국장직을 사임해서 2차 대전 중 OSS 시절부터 30년에 걸친 정보국 생활을 끝마쳤다. 헬름스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려는 닉슨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해서 CIA 국장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헬름스는 CIA가 워터게이트에 연루되는 사태를 막았다. 헬름스는 의회 인준 청문을 거친 후 4월 초에 이란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상원 외교위원회 인준 청문 과정에서 1970년 칠레 대선 과정에서 CIA가 아엔데의 반대 정파(우파)를 지원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헬름스는 공개된 의회 절차에서 CIA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관례에 입각해서 “그런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이 부분 때문에 헬름스는 카터 행정부 들어서 위증으로 기소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헬름스가 이란 주재 대사를 선택한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란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최전선 정보 기지였다. 미국은 이란에서 소련을 감시하는 정교한 레이더망(網)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당시 이란의 내정은 위태로웠다. 이란 국왕 샤, 즉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1919~1980. 7. 27)는 1953년 8월 CIA가 기획한 쿠데타로 모사데크 정부가 무너져서 실권을 장악했을 뿐더러 헬름스가 다닌 스위스의 사립고교를 다녀서 헬름스와는 고교 동문이기도 했다.

헬름스는 대사 재직 중 무려 16차례나 워싱턴을 다녀가야 했는데, 모두 의회에서의 증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워터게이트와 관련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이 주재한 CIA 활동 조사위원회의 청문에 참석해서 증언을 해야만 했다. 헬름스는 CIA의 과거 활동에 대해선 철저하게 답변을 회피하거나 기억이 없다는 식으로 넘겼다. CIA는 결코 자신들의 활동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고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환멸을 느낀 헬름스는 1976년 대선 직전에 포드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했다. 그 해 대선에서 포드는 지미 카터에게 패배했고, 그 해 연말 헬름스는 대사직을 그만두고 귀국 길에 올랐다. (계속)

- 사진 : 상원 청문회에서 답변하는 리차드 헬름스.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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