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누가 흑인인가 ?

작성일 : 2008-11-29 11:40조회 : 3,525

누가 흑인인가 ?

이상돈 (2008. 11. 29)

우리는 가수 인순이 씨를 ‘혼혈’이라고 부르지 ‘흑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습게 들리겠지만, 인순이 씨가 미국에 가면 꼼짝없이 ‘흑인’이 되고 만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흑백 혼혈임에도 ‘흑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미국에선 “백인 어머니가 흑인 아이를 가질 수는 있지만, 흑인 어머니는 백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선 그런 일이 없는데, 유독 미국에서만 그러하다. (과거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그러했었다.)

이처럼 미국에선 ‘흑인의 피가 섞인 사람’은 무조건 ‘흑인’이 되고 마는 데, 이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에 남부에 생겨서 195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인종분리정책(segregation) 때문이다.

흑백인 분리 정책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는 드디어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많은 흑인들은 갈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노예를 해방시켰다는 북부도 남부의 흑인들을 수용할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결국 대부분의 흑인들은 남부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생활에 차이가 생겼다면 농장에서 일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것뿐이었다. 남부에 진주해 있던 북군(미군, Union Army)이 철수하자 남부 주(州)의 정치는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백인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아무리 흑인들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흑인과 백인이 같이 어울려 살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무엇보다 흑인들의 경제적 여건과 지위는 백인 농장주나 상공인, 그리고 백인 노동자들과도 엄연히 달랐다.

남부 백인들이 장악한 남부의 지방정부는 흑인 분리(segregation) 정책을 강화했다. 공공시설, 교육시설, 대중교통시설 등 모든 시설에서 백인과 흑인의 시설이 별도로 설치됐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누가 흑인인가 ?”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을 흑인으로 볼 것인가, 백인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이 문제는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Plessy v. Ferguson 사건에서 다루어졌다.

루이지애나 크레올

18세기까지 남부 루이지애나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던 변방 지역이었다. 그곳에 정착한 스페인 및 프랑스계(系) 백인, 그리고 그들과 결혼한 흑인,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은 크레올(Creoles)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백인과 혼혈, 그리고 흑인이 어울려 사는 독특한 토착 문화를 형성했다. 혼혈 크레올은 자유 유색인(free colored people)으로 노예 흑인과는 다른 지위를 갖고 있었다.

1803년에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령(領) 루이지애나를 사들여서 미국의 영토가 미시시피 강 하류에서 캐나다 국경지대에 이르는 중서부로 확장되었다. 그러자 루이지애나에도 영국계 백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루이지애나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크레올은 흑인과 백인을 엄격히 구분하는 영국계 미국인들에게 대해 저항감을 갖았다. 목화농장이 많은 루이지애나에는 흑인 노예도 많았기 때문에, 남북 전쟁 후에는 자유인이 된 흑인이 갑자기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에 진주해 있던 북군이 철수하자 남부 주는 인종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새로 제정된 헌법 수정조항의 요건에 합치하면서도 흑인을 격리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다.

플레시 대(對) 퍼거슨 사건

1890년, 루이지애나 주의회는 열차와 전차에 흑인과 백인의 전용칸을 구분하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이 통과되자 원래부터 인종 차별을 모르고 살아온 크레올 주민들은 분개했다. 주로 크레올 주민들로 구성된 시민단체는 이 법을 헌법 위반으로 제소하기로 결정하고 뉴올린스에서 제화공(製靴工)으로 일하던 호머 플레시에게 “이 법률을 고의로 위반할 수 있나?”고 문의했다. 당시 29세이던 플레시는 증조모가 흑인이어서 혈통의 7/8은 백인이었고, 외모도 백인으로 보였지만 피부색이 약간 갈색이었다.

1892년 6월 7일 플레시는 뉴올린스에서 코빙턴을 향하는 열차의 백인 객차에 탑승했다. 열차 승무원이 표를 검사하러 오자 플레시는 자기는 혈통의 7/8이 백인이라면서 흑인 칸에 탑승하기를 거부했다. 플레시는 체포되었고, 다음날 보석금 500달러를 내고 석방되었다. 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는 흑백인 분리가 위헌이라고 주장했지만, 연방대법원은 1896년에 ‘분리되어도 평등하면(separate but equal)’ 헌법의 평등보호 조항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남북 전쟁 전에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고 한 Dred Scott 판결과 더불어 미국 대법원이 남긴 가장 잘못된 판결로 평가된다.

‘피 한 방울 원칙’ (One-Drop Rule)

플레시 판결에 고무된 남부 주(州)들은 백인과 흑인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강화했다. 또한 이들은 백인과 흑인이 결혼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을 제정했다. 남부에서 백인 노예주인과 흑인 여자노예 간에 많은 혼혈아가 태어나고 난 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런 법률이 제정된 것이다. 그러면서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분류하는 원칙을 도입했으니, 이것이 ‘One-Drop Rule’이다.

1910년에 테네시와 루이지애나가 처음으로 이런 법을 제정했고, 이어서 텍사스,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앨러바마, 조지아 등 모든 남부 주가 그런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자 흑인 혈통이 1/16 또는 1/32가 있으면 흑인으로 본다는 조항이 있었던 플로리다, 인디애나, 켄터키 등도 법률을 개정해서 ‘One-Drop Rule’을 사실상 수용했다. 이런 주법(州法)들은 대개 인종을 등록할 때 이런 기준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인종을 허위로 등록하는 행위를 처벌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혼혈인은 흑인으로 분류되어 차별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실망하고 분노한 많은 혼혈인들은 고향인 남부를 버리고 북부로 옮겨갔지만, 이런 상황은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1954년에 드디어 연방대법원이 흑백 분리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또한 1967년에 연방대법원은 인종간 결혼을 금지한 버지니아 주법을 위헌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차별적 목적으로 사용되던 ‘One-Drop Rule’은 용도를 상실했다.

혼혈을 흑인으로 분류한 데 따른 역(逆)작용

‘One-Drop Rule’은 흑백 혼혈인들이 자신들을 흑인이라고 규정짓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혼혈 흑인들이 자신들을 백인과 동일시(同一視)하기보다는 흑인과 동일시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와서 흑인들을 단결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 것이다. (이러한 심리가 오바마의 당선에도 적잖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부의 백인 농장주와 흑인 여자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흑인들 중에는 아버지에 의해 자유인으로 해방되어 북부로 이사 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했다. 이들은 남부에 주저앉은 흑인들보다 좋은 교육을 받아 북부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그런가 하면, 혼혈 흑인이 자기를 흑인으로 규정짓고 흑인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 1856-1915)이 그런 경우다.

부커 워싱턴은 버지니아 남서부에서 백인 농장주와 흑인 여자 노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백인 아버지는 그와 그의 어머니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 남북전쟁 후에 노예가 해방되자 부커의 어머니는 부커와 동생들을 데리고 웨스트 버지니아로 이사를 갔다. 백인 사업가의 집에서 일을 하다가 그의 근면에 감탄한 주인집 부인의 도움으로 직업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신학교를 다닌 후에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알라바마의 투스카키 학교에서 교장직을 맡게 되었고, 59세에 사망할 때까지 흑인들을 교육하면서 투스카키 학교를 오늘날의 투스카키 대학으로 키웠다. 그는 록펠러 등 대기업가들의 후원으로 흑인교육기관을 여러 곳에 세우는 등 흑인들의 교육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뉴욕의 할렘에서 강경한 흑인인권운동을 일으키다가 암살당한 맬콤 X(1925-1965)도 흑백 혼혈이었다. 맬콤 X는 흑인 민권운동을 하던 흑인 목사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 탓에 맬콤 X의 피부 색깔은 상당히 밝았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맬콤 X는 강경한 흑인해방운동을 펼쳤는데, 그는 자신에게 백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소수인종 우대 정책과 ‘가짜 흑인’

미국 대법원에 의해 흑백 분리와 흑백인간 결혼금지가 폐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존슨 행정부 들어서 흑인 등 소수인종을 우대하는 정책(affirmative action)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외관으로는 백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자기 혈통의 1/16이 흑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흑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수 인종 우대정책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법원은 이런 사건에 대해 다소 혼란스러운 판결을 내리고 있다.

혼혈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미래

오늘날 미국 흑인 중 1/3 정도는 백인의 DNA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백인 피가 섞인 흑인들이 자신들의 백인 조상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종의 타부인 것이다. 그것은 ‘One-Drop Rule’이 자초한 면도 있다. 혈통적으로 백인에 가까운 사람들이 제도적으로 흑인으로 묶여 버렸고, 그런 탓에 혼혈 흑인은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갔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단순히 흑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사실은 흑백 혼혈인 경우가 많다. 앞서 소개한 흑인 인권운동가 부커 워싱턴, 말콤 X 외에도 역시 흑인 인권 운동가인 두 보아(W. E. B. Du Bois : 1868-1963)도 그러하다. NBC 방송에서 15년 간 투데이 쇼를 진행했던 흑인 미남 방송인 브라이언 검블(Bryant Gumbel : 1948년 생), 그리고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도 혼혈이다. 검블은 루이지애나 혼혈 크레올이고, 파월의 부모는 자메이카 본토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물라토였다.

백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 중에도 혼혈인 경우도 많다. 조류(鳥類) 분류학자이고 자연주의자이며 화가였던 존 오드본(John Audubon : 1785-1851. 환경단체 ‘오드본 소사이어티’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런 명칭을 붙였다.), 전설적인 루이지애나 출신의 해적 진 라피트(Jean Laffite :1776-1826 추정)가 그런 경우이다.

혼혈 유명인 중에 루이지애나 출신 크레올이 비중이 크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존 오드본, 진 라피트(해적을 유명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그렇지만, 라피트는 앤드류 잭슨 장군을 도와서 1812년 미영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브라이언 검블이 그러하다. 크레올은 보통 흑인들이 노예생활을 할 때에 자유인이라서 자기를 계발할 기회가 있었고, 해외 식민지에 나와 있던 프랑스/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은 워낙 숫자가 적어서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혼혈 자식을 많이 낳아서 동등하게 교육을 시키고 직업기술을 갖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최근 들어 미국에선 아시아(系), 중남미계(系), 백인, 흑인, 그리고 혼혈 흑인 사이의 인종과 피부색을 뛰어 넘는 결혼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의 미국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징후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혼혈 흑인들이 자신들이 흑인이 아닌 ‘혼혈’이라고 정체성을 내세우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자칫하면 ‘흑인 대(對) 혼혈 흑인’ 대립이라는 또 다른 인종분규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흑인 사회는 ‘혼혈 흑인’이란 인종분류를 도입하려는 데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미국에 ‘아시아-백인 혼혈’은 있지만 ‘흑백 혼혈’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C) 이상돈

이전글4대강 '토론'을 하자고 ?

리스트로

이상돈닷컴

이상돈

LEESANGDON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