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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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공동 양복점 거리
작성일 : 2022-11-21 19:51조회 : 72


소공동 양복점 거리


시청에서 한국은행 건물 쪽으로 가는 거리에 있던 소공동 양복점 거리가 드디어 사라졌다. 거기에 있던 양복점이 하나 둘 문을 닫더니 완전히 헐린 것이다.(아래 사진 1) 기성복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까지 남자들은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어 입었는데, 고급 양복점은 소공동 거리와 을지로 입구에 모여 있었다. (이제는 <해창>과 <체스타필드>만이 조선호텔 건너편에서 오래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소공동 거리는 1970년대가 전성기가 아니었나 한다. 1970년대에 소공동 거리에 <사비로 양복점>이 있었는데, 정확히 어느 시점에 문을 닫았는지는 모르겠다. 재미있는 것은 ‘사비로’라는 표현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초에도 “사비로를 해 입었다”, ‘사비로를 쫙 빼입었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영국 런던 한복판에 고급 양복점이 모여 있는 ’새빌 로우‘(Savile Row) 거리를 특유의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하다 보니 ’사비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사비로‘가 고급 맞춤 양복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로 쓰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소공로에 있는 ”사비로 양복점에서 사비로를 해 입었다“는, 우스운 표현이 나올 수가 있다. (정작 일본에선 ‘세비로’라고 발음하고 양복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화 되었다고 한다.)

내가 어릴 적에는 ‘마카오 신사’라는 표현이 있었다. 겨울철에 양복에 모직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쓰고 지나가는 점잖은 남자를 ‘마카오 신사’라고 불렀다. ‘마카오 신사’의 어원은 “마카오를 거쳐 밀수입된 영국제 양복지로 양복을 해 입은 신사”라고 하는데,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양복지를 만들지 못했고 정식으로 수입도 되지 않아서 양복감은 대개 밀수된 것이었다. 5.16 쿠데타(당시 명칭은 ‘군사혁명’) 주체세력이 내건 이른바 ‘혁명공약’에는 밀수품 척결이 들어 있었다. (쿠데타 명분 중에 ‘밀수 척결’이 들어간 경우는 아마 5.16이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우리 세대는 기억을 하겠지만, 1950년대 말에 비로소 제일모직과 경남모직이 국산 양복지를 만들기 시작했으니까 1960년대부터 국산 양복지가 본격적으로 생산된 것이다. 1960년대 들어서 한일합섬과 한국나이롱(코오롱)이 화학섬유 시대를 열었고 이들은 폴리에스터 양복지를 생산했다. 박정희 정부가 밀수를 반역죄 수준으로 단속했기 때문에 이런 섬유재벌이 한동안 한국 재계에 군림했었다. 1980년대 들어서 반도상사(LG 상사의 옛 이름)와 삼성물산이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자 기성복 품질이 좋아졌고 동네 양복점은 하나둘 문을 닫고 사라져 갔다. 

1990년대 들어서 소공동의 양복점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기성복이 좋아진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 ‘닥스’, ‘아쿠아스 규텀’ 등 영국 브랜드 양복이 LG 등 기성복 메이커에 의해서 나오기 시작해서 구태여 맞춤양복을 해 입을 이유가 없어졌다. 1990년대 들어서 영국 파운드와 이태리 리라가 폭락하고 우리 원화 가치는 상승해서 영국제 양복지와 이태리 양복지가 싼 값에 수입돼서 해외 브랜드 양복으로 백화점에 나오게 되자 양복점 양복이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었다. 제일모직과 쌍벽을 이루었던 경남모직은 아예 없어져 버렸으니 세계화에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이런 지난 날을 되돌아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30년 전에 런던을 들렀을 때 도심 거리를 구경하면서 Savile Row를 지나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하고 찾아보았더니 여전히 최고급 맞춤 양복점 거리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 2는 최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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