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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스피로 애그뉴
작성일 : 2022-11-22 19:19조회 : 716
스피로 애그뉴
대통령이 특정한 언론, 또는 어떤 성향의 언론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점에서 트럼프는 파격적이었다.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CNN이 힐러리 클린턴 편을 든다면서 CNN을 ‘Clinton News Network'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했다. 트럼프는 대통령 임기 내내 CNN은 물론이고 뉴욕타임스 등 자기에 비판적인 뉴스 매체는 ’가짜 뉴스‘라고 몰아 붙였다. 그 즈음 트럼프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백악관이 언론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일은 스피로 애그뉴가 시작했다고 지적하는 칼럼이 나온 적이 있다. 그러면 스피로 애그뉴는 누구인가 ?
스피로 애그뉴(Spiro T. Agnew 1918~1996)는 닉슨 대통령 시절에 부통령을 지냈는데, 1973년 10월 세금 포탈과 금품 수수 혐의가 드러나서 사퇴했다. 닉슨 대통령은 그 후임으로 제럴드 포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명했고 포드는 의회의 동의를 얻어 부통령에 취임했으며 이듬해 8월 닉슨이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68년 여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것이 확실한 닉슨은 러닝메이트를 결정해야만 했다. 당시 공화당은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과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위시한 당내 우파가 있었고, 넬슨 록펠러 뉴욕 주지사와 조지 롬니 미시건 주지사 등 당내 진보파가 있었다. 닉슨은 레이건이나 록펠러 같은 중량급 인사를 러닝메이트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 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 조지 월러스 앨라배마 주지사가 남부 표를 가져갈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남부 출신인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도 고려대상에 올랐지만 그러는 경우 북부에서 표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숙고 끝에 닉슨은 스피로 애그뉴 메릴랜드 주지사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애그뉴의 부친은 그리스 출신 이민 1세대였으나 애그뉴는 자신이 그리스계로 비쳐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공황으로 부친이 경영하던 식당이 폐업을 하자 애그뉴는 일을 해가면서 공부를 했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볼티모어 로스쿨 야간을 다니던 중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육군에 입대해서 장교로 임관했다. 바스톤 등 유럽의 최전선에서 싸운 애그뉴는 훈장을 받고 전역했고, 로스쿨을 마저 다닌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애그뉴는 변호사로는 성공하지 못했고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했다.
지방정치에 관심이 있던 애그뉴는 공화당에 입당했다. 1956년 메릴랜드 지방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자 애그뉴는 도시계획위원으로 임명됐다. 4년 후에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자 애그뉴는 위원회에서 물러났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지명도를 얻게 됐다. 공화당 인사로 알려진 애그뉴는 1962년에 볼티모어 카운티 시장으로 선출됐다. 애그뉴는 민주당이 지배해 온 메릴랜드의 가장 큰 지자체의 단체장이 되어 메릴랜드에서 공화당 바람을 일으켰다. 1966년에 애그뉴는 공화당 후보로 메릴랜드 주지사에 도전했는데, 마침 민주당에서 분열이 생겨서 당선이 됐다.
주지사로서 애그뉴는 진취적인 정책을 채택했으나 1968년 들어서 빈번히 발생한 소요 사태에 강경하게 대응했고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후 폭동이 발생하자 주 방위군을 투입해서 신속하게 진압했다. 이처럼 법 질서 수호에 확실한 애그뉴를 닉슨은 눈 여겨 보았고 결국 애그뉴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애그뉴가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자 애그뉴가 도대체 누구냐는 말이 나왔으나 애그뉴는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선 좋은 평을 얻었다. 1968년 대선에서 애그뉴는 닉슨이 버지니아 테네시 켄터키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애그뉴가 부통령이 되자 그 해 가을에 재클린 케네디가 그리스의 부호 오나시스와 결혼을 하더니 이제는 그리스계 미국인이 부통령이 됐다는 유머가 나돌기도 했다. 애그뉴가 부통령이 되자 이발사 협회와 양복 재단사들이 환호했다는 유머도 있었다. 키가 큰 애그뉴는 옷을 잘 입었고 항상 이발을 단정하게 해서 당시 장발과 히피 차림이 유행해서 고전하고 있던 이발사와 양복 재단사들이 좋아했다는 이야기였다.
부통령은 상원 본회의 사회를 보는 일 외에는 고유 업무가 없기 때문에 대통령이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닉슨은 애그뉴를 국정의 파트너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닉슨은 애그뉴를 몇몇 중요하지 않은 위원회를 이끌도록 했다. 애그뉴가 대외정책에 대해 언급을 해서 뉴스에 나오자 닉슨은 밥 홀드먼 비서실장을 통해서 다시는 외교 사안에 언급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애그뉴는 그 후 닉슨을 대신해서 반전 시위대 등 급진 좌파 세력을 비난하는 역할을 맡았다.
닉슨은 1969년 11월 3일 ‘조용한 다수“(The Silent Majority) 연설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닉슨은 열흘 후 아이오와 주 디모인스에서 예정된 모임에서 애그뉴가 주목할 만한 연설을 하도록 했다. 애그뉴는 백악관 공보비서 패트릭 뷰캐넌이 기초한 연설문을 읽어 나갔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닉슨 대통령이 연설을 하면 소수의 네트워크 뉴스 논평자과 자칭 분석가들은 대통령의 발언과 정책을 즉각적으로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런 논평가들의 다수는 대통령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으며 그런 예단을 갖고 대통령의 발언을 비난한다. 이렇게 해서 4천만 시청자들은 편견을 갖고 있는 한주먹도 안 되는 평론가들에 의해 걸러진 뉴스를 접하고 있으니, 일종의 검열이 작용하고 있다.”
이는 폭탄선언이었다. CBS 등 네트워크 방송은 반박 성명을 내고 뉴스 진행자들이 직접 비난을 했다. 하지만 애그뉴는 이에 굴하지 않고 11월 20일에는 앨라배마 몽고메리에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를 똑 같은 논지로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 역시 패트릭 뷰캐넌이 기초하고 닉슨이 승낙을 한 대본이었다. 동부 언론에 식상해 있던 보수층은 이런 애그뉴의 발언에 환호했다. 애그뉴는 타임, 라이프 등 잡지 커버에 등장하는 등 크게 부각됐다. 공화당내 보수층은 애그뉴가 닉슨에 이어서 1976년 대선에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등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970년 중간선거에서 애그뉴는 공화당 후보 지원유세를 했으며, 그런 과정에 애그뉴가 뱉어내는 강경한 논조는 화제가 됐다.
그 시절에는 로버트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고 블랙팬더 등 극좌파 단체가 폭발물 테러를 자행해서 대통령 경호가 삼엄했다. 애그뉴가 보수층의 환심을 사자 닉슨은 밥 홀드먼 비서실장한테 “애그뉴가 부통령으로 있는 한 나를 암살할 사람은 없을거야”하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 싫어하는 닉슨을 암살했다가는 더 끔찍한 애그뉴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테니까 닉슨이 그대로 대통령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라는 농담이었다.
닉슨이 중국과 대화를 트려고 하자 애그뉴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닉슨의 참모 중에는 너무 보수적인 애그뉴가 부담스럽다면서 1972년 대선에서 다른 사람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고도 했으나 닉슨은 애그뉴를 그대로 러닝메이트로 삼았다. 다시 부통령 후보가 됐음에도 애그뉴는 자신이 여전히 정책 결정에 완전히 소외되어 있는데 대해 불만을 갖았다. 1972년 6월에 발생한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사건에 대해서도 부통령인 애그뉴는 신문을 보고 아는 수 밖에 없었다.
1972년 대선은 예상대로 닉슨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닉슨의 러닝메이트로 애그뉴는 닉슨과 함께 선거 운동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상·하원의원과 주지사 선거에도 공화당 후보를 위해 열심히 지원 유세를 했다. 하지만 상·하원의원 선거와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에서 12석을 추가하는데 그쳤고 상원은 오히려 민주당에게 2석을 내어 주었다.
1973년 들어서 메릴랜드 소재 연방검찰청은 볼티모어 카운티가 발주한 공사를 둘러싼 문제를 수사했는데, 애그뉴가 시장으로 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자 애그뉴가 연루되었음을 알게 됐다. 엔지니어링 회사가 수주 대가로 정치인에게 헌금을 했는데, 시장이던 애그뉴도 돈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수사가 진전되자 회사 대표는 애그뉴가 부통령이 된 후에도 돈을 받았다고 진술했고 연방검사는 관련 증거를 확보했다. 그해 7월 연방검사는 애그뉴에 대한 기소가 불가피함을 엘리옷 리차드슨 법무장관에게 보고했고, 리차드슨 장관은 이를 닉슨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애그뉴는 이런 돈이 정치자금이라고 해명했으나 궁색할 뿐이었다.
8월이 되자 이 문제가 언론에 보도가 되어서 애그뉴는 부통령직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됐다. 애그뉴는 실형을 면하는 조건으로 사임을 하겠다고 법무장관에게 밝혔다. 10월 10일, 애그뉴는 법정에 출두해서 검찰이 기소한 탈세 혐의를 인정하고 1만 달러 벌금형을 받아들이고 곧 부통령 사직서를 제출했다.
고향 볼티모어로 돌아온 애그뉴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해서 생활마저 어려웠으나 책을 쓰고 사업을 시작해서 안정을 찾고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갔다. 회고록을 펴낸 후에는 사업에 열중했고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닉슨의 참모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해서 20년 동안 닉슨은 물론이고 닉슨의 참모들과도 만나지 않고 살았다. 1994년 4월 닉슨이 사망하자 닉슨의 두 딸은 애그뉴를 장례식에 초대했다. 애그뉴가 닉슨의 장례식에 참석하자 20년 동안 왕래가 없었던 닉슨 행정부 사람들은 오랜만에 그를 반갑게 맞았다. 닉슨의 장례식이 애그뉴가 참석했던 마지막 공식적인 자리이었다. 평소에 건강했던 애그뉴는 1996년 9월 16일 갑자기 쓰러졌고 다음 날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졌으며, 닉슨의 공보비서로 애그뉴와 가까웠던 패트릭 뷰캐넌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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