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드와이트 채핀

작성일 : 2023-02-22 19:51조회 : 607

드와이트 채핀

돌이켜 보면 나의 20대는 닉슨의 시대였고, 나의 30대는 레이건의 시대였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카터는 레이건의 시대를 가져 오는 역할이나 한 하찮은 존재였다. 닉슨의 시대를 이끌어 온 사람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닉슨 정부에서 각료를 지낸 사람 중에는 금년 5월에 100세가 되는 헨리 키신저만 생존해 있다. 닉슨의 백악관 스태프 중에는 닉슨의 스피치 라이터로 ‘조용한 다수’(The Silent Majority) 연설문을 기안한 패트릭 뷰캐넌(Patrick Buchanan 1938~)과 닉슨의 대변인실에서 일했던 다이앤 소여(Diane Sawyer 1945~)가 생존해 있다. 뷰캐넌은 보수 철학을 주창하는 책과 닉슨의 유산(legacy)을 정리한 책을 여러 권 펴냈다. 다이앤 소여는 닉슨이 사임한 후에도 닉슨의 회고록 집필을 도왔고, 그 후 닉슨이 그렇게 싫어했던 ABC와 CBS 방송에서 앵커로 명성을 떨쳤다.

닉슨의 1기 임기 동안 닉슨을 가장 가까이 수행한 비서는 드와이트 채핀(Dwight Chapin 1940~)이다. 닉슨의 집무실 입구 사무실에서 일했던 채핀은 닉슨의 약속과 면담자를 관리했다. 말하자면 문고리였다. 채핀은 남가주대학(USC) 졸업반일 때 닉슨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그 인연으로 캠프를 지휘했던 밥 홀드먼(Bob Haldeman 1926~1993)이 속해 있던 광고회사에서 같이 일하다가 홀드먼과 함께 1968년 닉슨의 대선 운동을 하고 백악관에 함께 입성했다. 닉슨의 비서실장이 된 홀드먼은 자기의 대학 후배이며 자기 말을 잘 들을 채핀을 닉슨의 근접 비서로 배치했다. 이렇게 해서 29세 젊은이가 닉슨 대통령을 아침부터 밤까지 가까이 보좌하게 됐으니 아마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닉슨은 백악관을 비우고 출타하거나 해외 출장을 갈 때에도 채핀을 데리고 다녔다. 캠프 데이비드나 샌 클레멘츠에 갈 때는 물론이고 베이징과 모스코바를 방문할 때도 채핀이 수행토록 했다. 하지만 워터게이트는 채핀을 피해가지 않았다. 채핀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신문을 보고 알 정도였지만 그의 남가주 대학 친구인 도널드 세그레티(Donald Segretti 1941~)를 닉슨 대통령 재선운동위원회에 취직시켜준 덕분에 기소돼서 유죄판결을 받고 9개월 동안 복역했다.

세그레티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유력했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을 상대로 흑색선전을 했음이 워터게이트를 취재하던 언론에 의해 드러나자 상원 청문회는 채핀을 소환했다. 청문회에서 채핀은 잘 모르겠다고 답변해서 위증으로 기소됐다. 세그레티는 검찰과 유죄협상으로 4개월 반 복역하고 출소했는데, 채핀은 무죄를 주장하면서 재판에서 다투다가 세그레티 보다 두 배나 되는 9개월 동안 복역했다. 재판이 진행 중일 때 닉슨의 사임 발표를 들은 채핀은 밤을 새우면서 울었다. 그만큼 채핀에게 닉슨은 큰 존재였다.

검찰과 대립한 덕분에 필요 이상 오랜 감옥살이를 한 채핀은 그 후 사기업에서 조용하게 일하고 은퇴했는데, 작년 초에 닉슨 백악관 4년 동안 자기가 겪고 본 바를 솔직하게 담아 놓은 회고록 <The President's Man>을 펴냈다. 닉슨 백악관에서 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책을 펴냈는데, 그 중 가장 늦게 나온 책일 뿐더러 닉슨을 가장 가까이 지켜 본 사람이 80세가 되어 펴낸 책이라서 매우 진솔하다. 이제 닉슨을 가까이 보았던 사람으로 책을 낼만한 사람은 다이앤 소여만 남은 것 같다. 다이앤 소여는 닉슨이 사임하고 캘리포니아 샌 클레멘트 저택에서 회고록을 쓸 때 워터게이트를 포함한 국내 정치 부분을 기초했다. 닉슨은 다이앤 소여가 많은 자료를 연구한 끝에 작성한 워터게이트에 관한 초고를 보고 워터게이트 사건의 전체를 비로소 파악했다고 전해진다. 백악관 참모 중 어느 누구도 워터게이트에 대해 닉슨에게 솔직하게 보고하지 못했던 것이다.

닉슨을 만나기 위해선 채핀을 거쳐야 하니까 닉슨을 언제든 만날 수 있었던 키신저도 채핀과 농담을 나누는 등 친근하게 대했다. 채핀의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254쪽) 닉슨 임기 초에 키신저는 닉슨을 꽤 오래 혼자서 만나고 집무실을 나오면서 채핀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You won't believe this--he must be crazy--he says he's going to go to China." (“이 말을 믿지 않을 거야. 그는 정신이 나갔어. 자기가 중국을 가겠다고 해.”) 즉, 키신저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을 세계 무대로 이끌어 오겠다고 하자 너무 황당하고 충격을 받아서 닉슨이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채핀에게 말한 것이다.

닉슨 시절에 있었던 중요한 결정은 모두 닉슨이 내리고 키신저는 그것을 충실하게 집행했을 뿐이다. 중국 방문은 물론이고 모스코바 방문도 그러했고 베트남 전쟁 종식도 그러했다. 키신저의 독자적 업적이라고 할 만 한 것은 1973년 가을에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정신이 혼미할 때 CIA에 칠레 군부의 쿠데타를 승인하라고 지시하고, 중동에서 4차 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생하고 전선(戰線)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텔아비브와 카이로를 왕래하면서 휴전협정을 맺도록 해서 나중에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평화협정을 체결토록 하는 토대를 놓은 것이다. 캄보디아 폭격과 침공, 라오스 작전, 1972년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도 모두 닉슨의 결정이었고 키신저는 닉슨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 대통령직을 물러난 닉슨은 키신저가 자신의 유산(legacy)을 훔쳐가고 있다고 주변에 말하기도 했다.

- 사진 (1) 베이징 방문 중 저우엔라이와 만찬자리를 함께 한 키신저와 채핀. 이 때 페킹 덕 요리가 나왔는데, 오리 머리가 그대로 달려 있었고 그 머리를 웨이터가 반으로 갈라서 ‘오리 뇌’(duck brain)라면서 키신저와 채핀의 접시에 놓았고 채핀은 그것을 눈 감고 먹은 후 잠시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키신저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먹었다고 한다.
- 사진 (2) 채핀 회고록.
- 사진 (3) 닉슨 대통령과 다이앤 소여. (1972년) 닉슨은 다이앤 소여를 높이 평가했다. 소여도 닉슨 백악관에서 경험과 닉슨 회고록 집필이 그 후의 방송 경력에 크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다이앤 소여는 고교 시절에 미인대회에 나가서 입상할 정도로 미인이고 힐러리 클린턴의 모교이기도 한 웰슬리 칼리지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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