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파리 평화협정

작성일 : 2023-12-04 16:03조회 : 336

파리 평화협정

며칠 전 타계한 헨리 키신저를 두고 그가 남베트남을 공산 세력에게 넘겨주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파리 평화협상을 키신저 외교의 성과라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키신저는 협상자(negotiator)에 불과했고 미국 측 협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닉슨 대통령이었다. 그런 닉슨은 미국을 베트남의 수렁에 빠뜨린 사람이 아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직접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1960년 대선에서 닉슨이 당선됐더라면 닉슨도 미국을 베트남 전쟁에 개입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케네디가 시작하고 존슨이 확대시킨 ‘민주당 정권의 전쟁’이었고, 닉슨은 이 전쟁을 명예롭게 끝내겠다고 약속하고 1968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1969년 1월, 남베트남에는 미군 50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닉슨은 임기 중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1971년 연말까지 미 지상군 전투병력은 전원 철수했고 군사고문단과 헬기 등 항공병력만 남아 있게 됐다. 소규모 의무부대 등 지원병력을 파견한 호주와 뉴질랜드도 1971년 말까지 철군을 해서 1972년 들어서는 외국군 지상 전투부대로는 한국군만 남아있었다. 북베트남은 이 기회에 아예 남베트남을 장악하려고 했으니 그것이 1972년 춘계 대공세(미국은 부활절 공세 ‘Easter Offensive’라고 부른다)였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미국의 대대적인 공습(‘라인배커 작전’ : 라인배커는 미식 축구의 수비수로, 학창시절에 미식 축구를 했던 닉슨이 직접 붙인 명칭이다.)과 미 군사고문단이 지휘한 남베트남군의 선전(善戰)으로 완전히 궤멸돼버렸다. 한국군이 고군분투(孤軍奮鬪)한 안케 패스 전투도 이 때 있었다. 미군 지휘부는 막심한 피해를 입은 북베트남군이 3~4년 동안은 전력(戰力)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파리에서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 정치국원 레둑토가 진행한 평화회담은 이런 배경 하에서 이루어 졌다.

닉슨은 1972년 11월 대선까지 협상을 매듭지어 하노이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미군 포로들을 조국으로 데려와야만 했다. 닉슨은 중국 방문과 소련과의 데땅트 외교를 통해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것이 불가능함을 곧 깨달았다. 무엇보다 닉슨은 대부분 해·공군 항공장교들인 미군 포로를 가족의 품으로 데려와야만 했다. 닉슨은 남베트남 군의 능력을 증강하고 미국이 군수물자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유사시엔 항공전력을 파견한다면 남베트남이 상당한 기간 동안 버티어 낼 것으로 기대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정식으로 조인된 평화협정(The Peace Accord)은 60일 내 미군과 연합군 철군, 포로 석방, 기뢰 제거 등을 규정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상원의원이 되는 존 매케인 등 미군 포로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한국군도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닉슨은 국내의 정치적 압력과 선거, 그리고 포로 문제로 인해 불리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닉슨은 종전(終戰)을 앞두고 남베트남에 막대한 군비(軍備) 지원을 했다. 미군이 사용하던 A-1, A-37 지상공격기 외에도 F-5 전투기를 공급했고 탱크, 야포 등 막대한 지상군 물자를 보냈다. 파리 협정은 미국이 남베트남에 전쟁 물자를 보충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닉슨은 군수물자를 지속적으로 보충하면 남베트남군이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1973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불거진 워터게이트 파문으로 의회에선 반(反)닉슨 정서가 팽배했다. 민주당 의원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는 남베트남에 대한 전쟁 물자 공급을 거부했고 대통령의 군사행동을 제약하는 전쟁권 결의(The War Powers Resolution)를 닉슨의 거부권 행사를 극복하고 통과시켰다. 이렇게 되자 남베트남군은 탄약과 연료가 부족해서 포탄을 아껴야 했고 항공기와 탱크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됐다.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사이공에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닉슨은 1974년 8월 9일 사임했고, 사이공은 1975년 4월 30일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베트남은 공산화로 통일이 되고 말았다.

파리 평화협정에는 미국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재건을 지원하며 북베트남은 미군 실종자 문제와 유해 송환에 협력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평화협정 조인을 며칠 앞둔 1월 24일 헨리 키신저는 평화협정에는 여하한 비밀양해가 없으며 북베트남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지원을 약속한 바도 없다고 밝혔다.

북베트남이 파리 협정을 파기하고 사이공을 점령하자 미군 실종자와 유해 송환 문제는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1976년 1월, 폴 매클로스키, 조지 맥거번 등 일단의 미국 의원들이 유해 송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하노이를 방문했다. 이들은 하노이 정부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파리 협상 당시에 키신저는 레둑토에게 미국이 북베트남의 재건을 위해 3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그것을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과 파리 협정 당시의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로저스는 그런 구체적 지원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필립 하비브 국무차관도 그해 7월 의회에서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증언을 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1977년 5월, 리차드 닉슨은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 위원장인 레스터 울프(Lester Wolff 1919~2021) 의원에 보낸 공개서신에서 그러한 이면(裏面) 양해각서가 있으며 이는 비밀로 분류되어 왔음을 인정했다. 닉슨은 파리 협정 조인 후 4일이 지난 2월 1일자로 키신저를 통해 북베트남 팜반동 국가주석에게 북베트남 재건을 위해 22억 5천만 달러와 식량과 건축자재 등 10억~15억 달러 상당의 물자를 보내겠다는 메모랜덤을 보냈음을 확인한 것이다. 울프 의원 등은 키신저와 로저스가 미 국민과 의회에 대해 거짓말을 해 왔다고 비난했다.

닉슨은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메모가 파리 협정의 전제 조건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닉슨은 미국은 의회의 동의가 없이는 이런 약속을 이행할 수 없음을 북베트남도 인지하고 있으며, 특히 북베트남이 파리 협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이 약속은 근거를 상실했다고 언급했다. 울프 의원 등도 이런 닉슨의 의견에 찬성해서 북베트남에 여하한 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카터 대통령도 북베트남이 파리 협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에 대해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의회는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런 사정으로 보건대 파리 협상 막판에 키신저는 이러한 북베트남의 요구를 닉슨에게 전달해서 승인을 얻어냈던 것이 분명하다. 다만 키신저는 이를 비밀로 하기로 레둑토와 합의를 해서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파리 평화협정은 이처럼 미국에 불리한 것이었으니 키신저가 파리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는 ‘찬사(讚辭)’는 허황된 것이다. 키신저는 파리 협정을 이룩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상금은 베트남 전몰장병 재단에 전액 기부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북베트남이 참으로 순진하고 뻔뻔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장악해서 파리 협정을 휴지로 만들었음에도 미국에 대해 32억 5천만 달러 지급 약속을 지키라고 주장했으니 도무지 제 정신인지 의심스럽지 않은가.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뻔뻔하다.) 통일된 베트남은 경제가 매우 어려워서 파탄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하노이 정부는 미국 정부가 제공할 32억 5천만 달러에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물 건너가자 많은 토론 끝에 ‘도이 모이’라는 개방정책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파리 평화협정의 당사국은 아니지만 이 협정은 미국의 연합군(allied force)에도 적용이 된다. 파리 협정 당시 한국군은 유일한 미국의 연합군이었고, 한국군은 이에 근거해서 철군을 했다. 파리 평화협정은 미국이 북베트남 재건을 위해 노력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전후(戰後) 처리에 대해선 미국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북베트남이 파리 협정을 파기했기 때문에 미국이 더 이상 북베트남에 대해 여하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같은 미국의 해석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한다.

사진 (1) : 파리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로저스 국무장관.
사진 (2) : 협상 타결을 발표한 후 레둑토와 활짝 웃는 키신저 안보보좌관.
사진 (3) : 오랜 포로 생활을 이겨내고 귀환하는 존 매케인 해군소령을 맞이하는 닉슨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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