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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존 스캘리와 알렉산드르 페클리소프
작성일 : 2024-03-30 14:23조회 : 163


존 스캘리와 알렉산드르 페클리소프


1962년 10월 24일, 흐르시쵸프(Nikita Khrushchev 1894~1971) 소련 수상은 타스 통신을 통해서 미국의 해상봉쇄 조치가 해적행위라고 비난했다. 흐르시쵸프는 케네디에 보낸 전신 통신문에서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전쟁 행위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해상봉쇄 조치를 취하면서 쿠바에 들어와 있는 미사일을 철수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후 이틀 만에 나온 소련의 공식적 반응이었다. 세계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핵전쟁 공포에 휘말렸다.

쿠바에 대한 공습과 침공을 하기 전에 소련과 외교적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애들라이 스티븐슨(Adlai E. Stevenson II 1900~1965) 유엔 주재 미국 대사였다. 10월 16일 확대안보회의에 참석한 스티븐슨 대사는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지 볼(George Ball 1909~1994) 국무차관보만이 그에 동조했다. 스티븐슨은 일리노이 주지사를 지내고 1952년과 195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으나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에 패배했다. 1960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당의 원로였던 해리 트루먼과 일리노어 루스벨트는 케네디는 범죄자 집안 자식이라고 생각해서 스티븐슨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배경이 있어서 케네디는 스티븐슨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무슨 자리이든 대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유엔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스티븐슨도 자기가 국무장관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疎遠)했다. 사정이 이러해서 스티븐슨 대사의 협상론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흐르시쵸프가 미국을 비난하는 통신문을 보낸 그 다음 날인 10월 25일 아침,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언론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1889~1974)이 신디케이트 칼럼을 통해 소련은 쿠바에 있는 소련 미사일을 철수하고 미국은 터키에 배치돼 있는 주피터 핵미사일을 철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리프먼의 이 칼럼은 소련에게 쿠바 미사일 철수를 요구하고 동시에 미국도 무엇을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한 애들라이 스티븐슨 대사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실제로 스티븐슨 대사에 동조하는 조지 볼 국무차관보는 월터 리프먼과 긴밀하게 만나고 있었다. 한편, 10월 25~26일 간 해상봉쇄가 효과를 보이자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군사적 대응을 주장하는 합동참모본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강경론으로 기울었다. 반면에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UN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미소 양국이 핵전쟁으로 치닫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이를 협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제안을 막후에서 먼저 한 쪽은 소련이었다. 당시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관의 KGB 책임자이던 알렉산드르 페클리소프(Aleksandr Feklisov 1914~2007)는 알렉산드르 포민이란 가명을 쓰고 있었다. 그는 1941년부터 뉴욕에 있는 소련 영사관에 위장된 신분으로 근무하면서 미국의 원자폭탄 비밀을 알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클라우스 푹스와 줄리우스 로젠버그를 포섭해서 이들이 미국의 원자폭탄 기밀을 소련에 넘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푹스는 체포돼서 장기 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로젠버그는 부인과 함께 체포돼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1950년에 본국으로 돌아간 페클리소프는 1960년에 워싱턴의 소련 대사관 KGB 책임자로 다시 미국 근무를 시작했다. 

페클리소프는 ABC 방송의 외교 담당자로 백악관과 국무부를 취재하는 존 스캘리(John Scali 1918~1995) 기자를 알게 됐다. 페클리소프는 존 스캘리가 케네디 대통령과 직접 소통하는 언론인임을 알았고, 존 스캘리는 페클리소프가 KGB 책임자임을 알았다. 10월 22일 아침, 존 스캘리는 페클리소프와 함께 조찬을 하면서 소련이 쿠바에 핵 미사일을 들여왔다고 비난했다. 22일 아침은 케네디 대통령이 이런 사실을 기자회견으로 밝히기 전이라서 페클리소프는 존 스캘리가 미국 정부 최고위층과 통하고 있다고 느꼈다. 

10월 26일 페클리소프는 존 스캘리를 오후 2시에 식당에 초대해서 쿠바 위기를 타개할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점심이 끝난 후 스캘리는 페클리소프가 이야기한 내용을 정리해서 자신의 친구인 로저 힐스먼(Roger Hilsman 1919~2014) 국무부 정보국장에게 전했다. 그 내용은 소련은 미사일을 철수하고, 유엔이 이 과정을 감시하며,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힐스먼의 보고를 받은 러스크 국무장관은 스캘리에게 미소 양국 대사가 유엔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면서 시간이 급박하다는 메모를 보냈다. 저녁 7시 35분, 스캘리는 힐튼 호텔 커피숍에서 페클리소프를 다시 만나서 러스크 장관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자 페클리소프는 쿠바 침공을 위해 미군을 배치한 플로리다와 카리브 해에 대한 감시를 새로운 조건으로 추가해서 제시했다. 스캘리는 이를 러스크 장관에게 곧바로 보고했다. 페클리소프도 KGB 상부에 이를 즉시 보고했다.

쿠바 위기가 있은 후 40년이 지난 2000년대 초, 말년의 페클리소프는 존 스캘리의 주장과는 약간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10월 26일 2시 점심 때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으나 스캘리가 다시 급하게 만나자고 해서 4시에 만났더니 소련은 미사일을 철수하고 미국은 해상봉쇄를 해제하며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겠다는 해결책을 제시했으며, 자신은 이를  KGB 상부에 즉시 보고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설명이 다르지만, 대체로 존 스캘리의 설명이 보다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렇게 해서 케네디 대통령과 확대안보회의는 소련이 협상으로 위기를 타개할 의도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평가했다. 비록 페클리소프의 생각은 소련 정부의 공식적 제안은 아니었지만 미국 언론인과 KGB 주재관 사이의 이러한 대화로 인해 양국 의사결정자들이 협상으로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사진  (1) : 쿠바로 향하는 소련 화물선을 돌려보내는 미 해군 구축함과 초계기.
사진  (2) : 유엔 대사 시절의 존 스캘리. 리차드 닉슨 대통령과도 가까웠던 그는 1973~75년간 유엔 주재 대사를 지냈고, 그 후 ABC 방송에 복귀해서 1993년에 은퇴할 때까지 진행자와 평론가로 일했다.
사진  (3) : 페클리소프는 2007년에 94세로 사망했다. 그가 작고하자 러시아 정부는 그를 기리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KGB 선배인 그를 미국으로부터 핵무기 기술을 빼내 온 애국자로 기념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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