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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962년 10월 28일
작성일 : 2024-04-01 17:21조회 : 160


1962년 10월 28일


1962년 10월 27일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한 미소 간의 긴장이 언제 전쟁으로 발전할지 모르던 하루였다. 그 날 쿠바 상공에선 미국의 고공 정찰기 U-2기가 격추됐고 카리브 해에선 소련 잠수함과 미국 구축함 사이에 위험한 대치상태가 있었다.

그날 백악관에선 하루 종일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오후 7시 20분, 한 시간 동안 자리를 떴던 케네디 대통령은 확대안보회의 회의석으로 돌아왔다. 케네디는 로버트 케네디에게 도브리닌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에게 연락을 해서 약속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도브리닌 대사는 법무장관실로 자기가 오겠다고 답했다. 맥조지 번디 안보보좌관은 참석자 사이에서도 의견의 차이가 많다면서 회의를 속개했다. 얼마 전까지 소련 주재 대사를 지낸 르웰린 톰슨(Llwellyn Thompson 1904~1972)은 쿠바 문제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사안이기 때문에 터키에 대한 NATO 입장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과 협상하기 위해선 터키에 있는 미사일 문제를 NATO와 의논해야 한다고 확실하게 밝혔다.

케네디가 한 시간 동안 회의석상을 비운 사이에 린든 존슨 부통령은 “우리가 터키 정부와 NATO에 대해 터키에 있는 미사일을 철수하고 그 대신 폴라리스 핵미사일을 탑재한 핵 잠수함을 배치하겠다고 국방장관이 통보하는 방법이 있다”고 이례적으로 단호하게 발언했다. 반면에 더글라스 딜론 재무장관은 소련에 대해 최후통첩을 보내는 대신 쿠바에 있는 지대공 미사일을 먼저 공격해서 파괴하는 방법이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이미 소련과 미국이 쿠바와 터키에서 미사일을 각각 철수하는 방안으로 기울어 있었다.

확대안보회의를 끝낸 후 케네디는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조지 볼 국무차관보, 로스웰 길패트릭(Roswell Gilpatric 1906~1996) 국방차관, 르웰린 톰슨 대사, 시어도어  소렌슨,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를 대통령 집무실로 불렀다. 러스크 장관은 터키 주재 미국 대사가 터키 정부는 미국이 터키에 있는 주피터 미사일을 비밀리에 철수한다면 동의할 수 있다고 보고한 비밀전문을 보여 주면서, 터키로부터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를 소련이 비밀로 해주면 타결하겠다고 로버트 케네디가 도브리닌 대사에게 통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딘 러스크가 제시한 방안이 결국에 케네디와 흐르시쵸프에 의해 수용됐음에 주목 !!)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와 터키로부터 미사일 철수가 거래로 비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고, 이 자리에 모인 8명은 로버트 케네디가 도브리닌 대사와 만나 이런 협상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케네디는 흐르시쵸프 수상 앞으로 쿠바에서의 미사일 철수를 요구하는 10월 27일자 공식 전문을 보냈다.

도브리닌 대사가 법무장관실에 도착해서 로버트 케네디와 단 둘이서 만났다. 로버트 케네디는 흐르시쵸프가 제안한대로 터키에서 주피터 미사일을 몇 달 내에 철수할테니 이 사실을 비밀로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로버트 케네디와 도브리닌은 약 30분 동안 이야기를 했다. 도브리닌은 황급히 소련 대사관으로 돌아와서 본국에 비밀전문으로 둘이 나눈 대화를 보고했다. 냉전 종식 후 공개된 그 전문에 의하면,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 장군 중에는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터키 미사일 철수 문제는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터키에 관한 사항은 케네디 대통령과 자기, 그리고 2~3명만이 아는 극비 사항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로버트 케네디가 도브리닌 대사에게 대통령과 자기, 그리고 2~3명만 알고 있다고 말한 부분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로버트 케네디가 도브리닌에게 전달한 내용은 8명이 의견을 모은 결과였다. 

케네디가 보낸 10월 27일자 공식 전문과 도브리닌 대사가 보낸 비밀전문을 모두 받은 흐르시쵸프 수상은 케네디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10월 28일자 공식 전문에서 “귀하가 말하는 공격무기를 철수해서 소련으로 가져 오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흐르시쵸프는 도브리닌 대사를 통해 케네디에 보낸 비밀 전문에서 터키 안건에 관한 비밀합의가 공식 합의의 토대임을 분명히 지적했다. 모스코바 시간으로 10월 28일 오후 9시, 미국 동부 시간으론 오후 5시, 라디오 모스코바는 소련이 쿠바로부터 미사일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인류의 종말을 가져 올 수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해소된 것이다. 하루 전 만해도 전쟁이 일어날 듯했으나 케네디와 흐르시쵸프는 핵전쟁을 피하기로 합의를 이루었다. 핵전쟁 공포에 휩싸였던 세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케네디와 흐르시쵸프가 이룬 합의를 문언 그대로 받아드린다면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고 소련은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는 케네디의 승리로 보인다. 하지만 표면적 합의의 이면에는 터키에 있는 미국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또 다른 합의가 있었다. 터키에 있는 미국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약속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흐르시쵸프가 받아드렸기 때문에 미소 양국은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해소됨에 따라 케네디의 위상은 높아졌다. 케네디는 임기 초에 있었던 피그스 만 침공 실패로 큰 타격을 입었는데, 그러한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더구나 터키 미사일 철수는 표면에 드러난 합의가 아니라서 케네디는 큰 외교적 성과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1963년 여름까지 터키에서 소련을 겨루고 있던 주피터 중장거리 핵미사일을 조용히 극비리에 철수했다.

케네디와 그 핵심 측근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인들로 하여금 쿠바 합의를 케네디 정부의 공적으로 크게 홍보해 주도록 부탁했다. 케네디에 우호적인 스튜어트 앨섭(Stewart Alsop 1914~1974)과 찰스 바트렛(Charles Bartlett 1921~2017)의 1962년 12월 8일자 칼럼 ‘In Time of Crisis'(Saturday Evening Post)가 대표적이다. 이 칼럼은 케네디 형제가 강경한 군부와 유화적인 스티븐슨 대사 사이에서 역사적인 합의를 이루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는 케네디를 우상화하기 위한 여론조작(spinning)이었다. 터키 미사일 건은 공개되지 않은 이면약속이라서 케네디가 승리한 것으로 보였을 뿐이었고, 로버트 케네디가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 만나서 합의를 이룬 것이 아니고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등이 참석한 8인 회의가 내린 최종 결론을 로버트 케네디가 도브리닌 대사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즉, 로버트 케네디는 메신저에 불과했다.

케네디는 흐르시쵸프에게 미국은 쿠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CIA의 비밀작전(Op. Mongoose)은 중단됐다. CIA의 자금을 받아가면서 쿠바 수복을 꿈꾸던 마이애미의 쿠바 망명객(Cuban Exiles) 집단은 무기를 내려놓고 실업자 신세가 됐다. 카스트로를 향한 이들의 분노는 이제 케네디 형제를 향하게 됐다. 카스트로 암살작전을 수행하던 CIA 조직과 CIA의 위탁으로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작업을 해오던 마피아 그룹도 할 일을 잃어 버렸다. 이들은 케네디 형제를 반역자(traitors)이며 비겁자(cowards)로 보았다.

마릴린 먼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날은 1962년 8월 4~5일이었고 공식 부검 결과가 나온 날은 8월 18일이었다. 9월 1일에 로버트 키팅 상원의원이 쿠바 미사일 문제를 거론한 후 미국 정국은 완전히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케네디 형제는 먼로가 없어져 버리자 그들의 적(敵)이 먼로와 자신들과의 관계를 협박 재료로 사용할 가능성도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63년 초부터 법무부 검사들은 마피아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샘 지앙카나, 산토스 트라피칸트 등 마피아 보스들은 물론이고 지미 호파도 자신들을 향한 연방검찰의 강도 높은 압박을 피부로 느꼈다.

케네디가 쿠바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에 따라 카스트로한테 아바나의 호화판 카지노 호텔을 빼앗겨 버린 마피아 두목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회복할 가능성이 사라졌음을 알게 됐다. 이들은 케네디가 쿠바를 침공해서 자신들의 카지노 호텔을 도로 찾을 줄 알고 1960년 대통령 선거 때 케네디에 돈을 대고 케네디를 위해 부정선거를 했는데, 이제는 법무부 검사들이 그런 자신들을 상대로 수사를 하기 시작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케네디 암살의 배후를 오랫동안 조사한 연구자들은 1963년 봄부터 마피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정황적 증거를 많이 파악했다. 케네디 저격범으로 지목된 리 하비 오스월드(1939~1962. 11. 24)는 소련에서 돌아 온 후 댈러스에 살았는데, 1963년 4월 24일 자신의 원래 고향인 뉴올리언스로 가서 이모부 집에 도착했다. 오스월드의 이모부는 뉴올리언스 마피아 보스 칼로스 마르셀로의 충실한 조직원이었다. 오스월드를 케네디 암살범의 속죄양(patsy)으로 만드는 작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칼로스 마르셀로가 지하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남부의 보수적 도시 댈러스는 케네디를 죽이기에 좋은 곳이었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총성이 울렸고, 텍사스의 아들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이 됐다.
 
- 사진 (1) : 1962년 10월 28일자 NYT. 케네디가 터키 미사일을 철수하라는 흐르시쵸프의 제안을 거부해서 내일부터 당장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이다.
- 사진 (2) : 1962년 10월 29일자  NYT. 미소 양국이 타결을 이루었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면 양해인 터키 미사일 철수에 관한 언급은 당연히 없다. 그래서 케네디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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