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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971년 총선과 김홍일
작성일 : 2024-04-09 09:38조회 : 261


1971년 총선과 김홍일


한동훈 등 국민의힘 인사들이 투표일을 앞두고 ‘개헌 저지선’을 달라고 호소하고 나섰다. 비록 원내 제2당이라고 하더라도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이 개헌 저지선을 호소하고 나섰으니 이례적인 일이다.

총선을 앞두고 야당이 개헌 저지선을 호소한 적이 오래 전에 있었다. 1971년 5.25 총선에서였다. 그해 4월 대선에선 1969년 3선 개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출마해서 야당인 신민당 후보 김대중과 격돌해서 박 대통령이 승리했다. 3공화국에선 대선을 먼저하고 한 달 후에 총선을 했다. 대선에서 승리하면 공무원들이 여당 쪽에 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총선은 항상 야당에 불리한 게임이었다.

1971년 5월 총선을 앞두고 후보 등록을 하면서 신민당 대표인 유진산(柳珍山 1905~1974)이 자기 지역구인 영등포를 포기하고 전국구(비례대표) 1번으로 등록을 해 버렸다. 야당이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이 유진산을 강도 높게 비난했고, 유진산은 ‘사쿠라’라는 욕지거리가 나오는 등 야당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김대중 김영삼 등이 나서서 유진산은 당 대표를 그만두도록 하고 전당대회장이던 김홍일(金弘日  1898~1980) 의원을 대표 권한 대행으로 내세웠다.

독립군 출신이며 6.25 때 일선에서 후퇴한 국군 병력을 재조직해서 한강 남쪽을 지켜서 미군이 우리나라에 올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전쟁 영웅인 김홍일은 총선을 앞두고 “호헌선(護憲線)을 달라"고 호소했다. 이번에도 공화당이 개헌선인 의석 2/3를 차지하면 민주주의는 조종(弔鐘)을 울린다고 호소한 것이다. 일제 치하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운 독립군 출신이며 6.25 전쟁 영웅인 칠순(七旬)의 애국자 김홍일의 호소였다.

5.25 총선에서 공화당은 113석, 신민당은 89석을 차지해서 신민당이 약진(躍進)했다. 특히 서울에선 신민당이 18석을 차지한데 비해 공화당은 1석을 건지는데 그쳤다. 그 1석은 유진산이 지역구를 버리고 전국구로 도망간 영등포로, 박 대통령의 조카뻘 되는 장덕진이 당선됐다. 대구에선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과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던 이원만(코오롱 그룹 창업자) 의원이 낙선하는 등 대도시는 신민당이 휩쓸었다. 박 대통령은 김종필을 총리로 기용해서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5.25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는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1972년 10월, 유신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래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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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2023년 9월 30일자 기사


민주당 역사에서 잊혀진 이름.. 김홍일

김유성 기자 (입력 2023. 9. 30. 21:29)

- 1920년대부터 무장 항일투쟁 해온 인물
- 이후 장개석군에서 활약, 광복군에도 투신
- 한국전쟁 초기 7일간 인민군 저지하며 전과
- 박정희 정권에 반하며 야당 이끈 경력도 있어

[이데일리 김유성 기자] 민주당계 정당의 역사는 꽤 깁니다. 일제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에서부터 ‘민주당’, ‘민중당’ 등의 계보를 이어오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신민당’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습니다.

이 신민당에서 여러 반독재 투사들이 나왔는데 그 중 유명한 이들이 김영삼과 김대중이었습니다. 이 둘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겨루기도 했습니다.

신민당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산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당의 발자취는 남았습니다. 사실상 마지막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1년 단식을 하면서 전두환 정부에 항거했던 것이죠. 이 단식 투쟁은 1987년 민주화의 단초가 됩니다.

신민당을 거쳐 간 인물 중에는 ‘위대하다’ 평가를 받은 인물도 있는데 바로 김홍일 장군입니다. 대표 대행을 포함해 정식 대표까지 맡았던 인물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과 삼선개헌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20대였던 1920년대 만주 독립군에서 활동했고 1926년에는 중국 국민당군에 합류합니다. 장개석군에서 활약하다 2성장군까지 합니다. 이 와중에 상해 임시정부를 물밑에서 돕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도 김홍일 장군의 협조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1948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초기 한국군 양성에 힘을 씁니다. 1950년 6월까지 육군사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다 한국전쟁 당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긴급 투입됩니다. 그는 과거 야전 경험을 살려 1주일간 한강방어선을 지킵니다. 덕분에 미군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초기 한국군 장교 중 몇 안되는 광복군 출신이고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모습을 평생 보여왔기에 군사정부에서도 호감을 보입니다.

실제 그는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과 군정 외무부장관을 지냈습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박정희 정부로부터 받았습니다. 을지무공, 태극무공, 청조근정 등의 훈장도 수여됐습니다.

이후 1965년 박정희 정부가 한일협정을 체결하자 김 장군은 이에 반대했고 1968년 정계에 투신해 국회의원이 됩니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의장을 거쳐 1971년 신민당 당수(대표) 권한대행까지 맡았습니다.

김 장군은 만년에 광복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독립운동 업적에 군사적 업적, 독재에 반대했다는 부분까지 후대에 귀감이 되는 것이죠. 지금 더불어민주당이 자신들의 계보를 앞선 신민당으로까지 끌어 올린다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민주당에서는 김 장군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 열린 그의 43주기 추모제가 그 예입니다. 그의 아들 김덕재 씨와 박민식 보훈부 장관 등이 참석했습니다만, 민주당 당 지도부 혹은 민주당 의원 어느 하나 그 행사에 참여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뿌리가 한국 정당사에 있다고 본다면 앞선 신민당 시절 선배 정치인들의 발자취를 되새겨볼 필요도 분명 있어 보입니다. 상대 당에게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역사로 말이죠. 그냥 잊혀지기에는 너무 아까우면서 위대한 ‘역사’가 김홍일 장군입니다.

김유성 (kys401@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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