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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981년 미국 항공관제사 파업
작성일 : 2024-04-14 21:54조회 : 178


1981년 미국 항공관제사 파업


이번 총선에서 대통령과 여당은 의사 증원 이슈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의사들과의 대립이 대통령의 리더십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됐다. 여당에 나쁘게 작용했고 의료 대란을 일으켰을 뿐이다. 

여권은 의사 증원 문제를 노조 파업과 같이 보고 레이건 대통령이 항공관제사 파업을 처리한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본 보양이니. 참으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하다. 3월 8일자 중앙일보에는 <용산 "의사 서둘러 복귀해야"…화물연대 누른 '레이건 모델' 거론>이란 기사가 났다. “의사들의 집단행동과 관련해 대통령실에서 ‘레이건 모델’이 거론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1981년 공무원 신분으로 불법 파업에 나선 항공관제사 중 복귀명령을 거부한 이들을 해고하고 다시는 연방 공무원에 취업할 수 없도록 했다. - -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당시 레이건 전 대통령의 결정은 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 것이었다”며 “불법 집단행동에 나선 의사들은 레이건 모델을 참고해 서둘러 복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2월 27일에는 홍성걸 교수의 칼럼 <전공의 복귀 거부와 레이건式 해법>이 문화일보에 실렸다. 홍 교수는 의사파업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레이건의 항공관제사 해고 조치를 설명하고, 레이건이 “48시간 내 복귀하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시에 퇴직자와 군 관제사 등을 동원해 항공관제를 했고, 주요 노선을 제외한 항공편의 절반을 줄였다. 이틀 뒤, 48시간 내 복귀한 1650명을 제외한 나머지 1만1359명(87%)의 항공관제사는 즉각 해고됐고, 동시에 동일 업종 재취업은 영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지금은 레이건 같은 강한 결단과 의지가 필요한 때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은 이 칼럼을 읽었을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과 용산 참모, 그리고 홍 교수가 1981년 8월 항공관제사 파업 사건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항공관제사 파업은 1980년 대선에서 대승을 거둔 레이건이 임기 초  지지도가 높았던 시기에 발생했다. (선거를 앞두고 특정 집단과 싸우는 바보는 이번에 처음 봤다.) 1980년 대선을 앞둔 미국은 경제가 매우 어려웠다. 크라이슬러가 파산 위기에 처하는 등 실업이 심각했고 인플레는 연 10%가 넘었다. 대선을 앞두고 레이건 캠프는 노조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나 리차드 닉슨이 조지 미니 같은 노조 거물의 지지를 받았던 시절은 옛이야기였다. 그런데 항공관제사 노조(PATCO)는 레이건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레이건 캠프는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활용했다.

항공관제사는 교통부 산하 연방공무원이다. 연방공무원은 단체협약은 할 수 있으나 파업은 할 수 없다. 1960년대 들어 항공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항공관제사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는데, 주요 공급원은 군대에서 레이더를 보던 예비역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레이더를 다루었던 장병들이 제대한 후에 관제사 훈련소에서 몇 달 동안 교육을 받고 배치되어 현지 훈련을 거쳐서 관제사(controller)가 되는 것이다. 고졸 직업으로는 처우가 최고로 좋은 편이었고 항공여행이 늘어나서 일자리가 없어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는 자동차, 제철, 의류 등 제조업 노동자들이 대거 실업자가 되던 시기였다. (의과대학과 전공의를 거쳐야 하는 의사 직종을 공무원 신분인 항공관제사에 비교해 생각한다는 것도 한심하다.)

항공관제사노조(PATCO)는 크지는 않지만 결속력이 강했다. 베트남 전쟁에 레이더 관측병으로 참전했던 예비역 장병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1960년대 반체제(反體制) 정서를 갖고 있었다. PATCO는 초창기에 항공안전의 중요성을 제고하는 긍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없으면 항공기 운항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점차 강경한 방향을 지향했다. 카터 행정부는 임금 인상 등 PATCO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당시는 인플레와 실업으로 임금을 삭감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자 이들은 공화당을 기웃거렸다. 단 한 곳 노조의 지지가 아쉬웠던 레이건 캠프는 PATCO의 요구를 받아드렸고 PATCO는 레이건 후보를 지지했다. 이를 본 다른 노조들은 깜짝 놀랐다. 이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당시는 카터 대통령이 항공노선 규제완화를 해서 항공사들이 출혈경쟁을 할 때였다. 비행기 좌석이 절반도 안차고 운항을 해서 조종사나 승무원들은 임금 인상을 꿈도 꾸지 못했다. 항공사 정비공 노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민간 제조업은 문을 닫고 실업으로 아우성을 하는데, PATCO는 선거를 앞둔 공화당 덕분에 좋은 조건을 가질 수 있었다. PATCO 대표는 선거전에 이룬 합의를 토대로 그들의 고용주인 연방항공국(FAA)과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단체협상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그 대표는 자신들의 동료들에 의해 불신임 당했다. 그것으론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내건 조건 중에는 관제사가 항공기 승무원 좌석에 무임탑승하는 제도를 국제선까지 확대해 달라는 것도 있었다. 항공사는 그것을 거부했고 조종사와 승무원 노조도 이런 PATCO를 적대시했다. 공장이 문을 닫아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관제사 봉급을 보고 너무 높아서 깜짝 놀랐다. PATCO는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PATCO는 양보를 해서 타결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PATCO는 강경파에 의해 끌려가고 말았다. 이들은 파업이 불법임을 알지만 파업 위협을 하면 정부가 더 양보할 것으로 생각했다. 설마하니 공항 관제탑을 폐쇄하겠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건 백악관과 관계 부처는 이런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기업들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었고 대기업들은 이 기회에 노조를 약화시켜야 한다고 백악관에 로비를 했다. 1970년대에 경찰관 파업과 교사 파업을 경험한 대도시 시장과 공화당 의원들도 이 기회에 공공분야 파업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백악관에 로비를 했다. 백악관 참모 3인방 중 강경파인 에드윈 미즈(Edwin Meese 1931~) 특별보좌관이 이 문제를 맡았다.
 
파업에 대비해야 하는 책임은 드루 루이스(Drew Lewis 1931~2016) 교통장관의 몫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교통장관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루이스는 사업가 출신으로 실용적이고 유연한 정치인이었다. 노조와의 정면충돌을 예상한 그는 안전을 우선으로 한 비상계획을 수립해서 대처해 나갔다. 항공사에 운항을 줄여 줄 것을 부탁했고 자유화 덕분에 적자 노선이 많았던 항공사들은 기꺼이 응했다. 8월 3일 아침, 노조가 파업을 시작하자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 앞에서 48시간 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해고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교통부는 은퇴한 관제사, 군대 항공관제사 등을 모아서 인력을 확충했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조원도 상당수 있었는데 흑인과 여성이 많았다. 백인 예비역들이 중심이 된 PATCO는 흑인과 여성을 홀대했던 것이다. 실업률이 높은 그 시절에 관제사를 새로 뽑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오클라호마에 있는 관제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이들이 현지에 배치돼서 제 기능을 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나 시간이 결국 해결했다. 백악관은 캐나다 등 다른 나라의 관제사 노조가 동조하는 일이 없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와중에 PATCO는 자기들이 없으면 비행기 사고가 날 것이라고 광고를 했는데, 역효과만 잔뜩 나고 말았다. “저놈들은 비행기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했으니, 노동조합 운동 역사상 최악의 실수를 한 형상이었다. 

PATCO 파업은 큰 여파를 불러왔다. 그 후 공공분야 파업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런 분위기는 민간에도 퍼졌다. 하지만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 노조 활동 자체가 위축돼 버리는, 바람직하지 않은 트렌드를 조장했다. 잭 웰치라는 사람이 GE를 수술한 것이 대표적 경우이지만, 그런 GE는 결국 망해버렸다. 노조가 쇠퇴해서 근로자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한 미국이 과연 살기 좋은 미국인지는 생각해 볼 점이 적지 않다.
 
레이건의 원칙적 대응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는  1984~85년간 탄광노조 파업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 승리에 힙 입어 1983년 6월 총선에서 승리한 후에 비로소 탄광노조를 제압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노조와 싸우는 바보는 없다.) 배우 출신이라고 레이건을 우습게 봤던 소련 지도자들도 “저 사람은 말을 하면 그대로 하는구나” 하고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어떤 이는 공화당과 대기업들이 PATCO를 의도적으로 함정에 빠뜨려서 미국의 노조 운동을 와해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억측이다. 역사는 작은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아니한가.

- 사진 (1) : 1983년 8월 3일 오전 11시부터 전국에서 시작한 PATCO 파업 장면.
- 사진 (2) : 1983년 8월 3일 오전 10시 55분,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파업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48시간 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직위를 잃을 것을 경고했다. 매우 짤막하지만 명료한 메시지를 담은 스피치였다. 왼쪽은 윌리엄 프렌치 스미스 법무장관, 오른 쪽은 드루 루이스 교통장관. 드루 루이스는 항공관제가 정상을 찾은 후 사임했다. 레이건은 다른 직위를 주려고 했으나 그는 고사하고 민간기업으로 돌아갔다. 많은 관제사를 해고해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 아픔을 주어야 했기에 그 자신도 큰 상처를 입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임기 말에 그에게 백악관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으나 루이스는 사양했다. 레이건은 퇴임 후에도 드루 루이스에게 깊이 감사하는 감정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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