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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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실용' 보다 '신뢰'가 중요하다(황해문화)
작성일 : 2009-06-07 00:05조회 : 1,593
<‘황해문화’ 2009년 여름호>
‘실용’ 보다 ‘신뢰’가 중요하다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오늘날 중국의 번영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사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 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공산주의자인 덩샤오핑은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자본주의이건 공산주의이건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과감한 개방정책을 시행해서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는데, 그의 실용주의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고자 했던 측면이 컸다.
덩사오핑이 ‘실용’을 들고 나온 후 거의 30년 만에 ‘실용’을 표방한 이명박 정권이 우리나라에 들어섰다. 그러나 덩사오핑의 ‘실용’과 달리 이명박의 ‘실용’은 초장에 파탄을 맞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나는 이명박 정권은 태생적으로 ‘신뢰’를 얻지 못한 정권이며, 국정지표로서 ‘실용’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덩사오핑과는 다른 차원의 ‘실용’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부터 이명박 당시 후보는 유독 ‘실용’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이 공산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개발을 하겠다는 의도로 ‘실용’을 내세웠다면, 당시 이명박 후보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10년을 ‘좌파 정권’으로 규정하는 보수진영과 그렇지는 않지만 노무현 정권에 염증을 느낀 중도층을 함께 겨냥해서 ‘실용’을 내세웠을 것이다. 전통 보수층에 기반이 튼튼한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항해서 자신의 지표(指標)를 세워야할 이명박 후보로서는 ‘실용’이 가장 적절한 간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그에게 ‘실용’은 적절한 슬로건임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이명박 후보가 내건 ‘실용’은 덩사오핑이 내건 방법론적인 ‘실용’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이명박 후보가 내건 ‘실용’은 한마디로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주가 3000의 국민성공시대’라는 슬로건이 그것을 상징했다. 이명박 후보는 ‘자신이 걸어 온 과정’을 바로 ‘성공의 모델’이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면 성공하는 것”이라는 ‘부자 철학’을 ‘실용’으로 합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실용’이란 슬로건이 적절하게 구사된 경우는 경선 때 불거진 위장전입과 위장취업 문제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에 위장전입 한 건 때문에 많은 고위공직자들이 청문의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이명박 후보를 열 몇 차례의 위장전입을 고백하고도 버티어 냈다. 그는 또한 자식들이 자기가 운영하는 회사에 위장취업해서 세금을 절약했음이 드러나서 구차한 사과를 해야만 했다. 그가 ‘원칙과 이념’을 강조한 정치인이었다면 이러한 일련의 문제는 정계은퇴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이명박 후보는 ‘실용 정치인’이었기에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이런 현상이 용서되고 합리화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이 잘 몰랐던 것은 적어도 과반수의 국민은 그 같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실용’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뢰’가 실종되다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큰 공약은 한반도 대운하였다. 운송수단으로서 대운하가 경제성이 없다는 비판이 일자 대운하는 관광용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대통령 후보의 가장 큰 공약이 이렇게 말을 바꾸어야 했으니 ‘신뢰’와는 처음부터 담을 쌓았던 셈이다. 본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도곡동 땅 소유 의혹, BBK 동영상 등 온갖 악재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이명박 후보는 정동영 후보를 큰 표차로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러나 이런 승리에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 이명박 후보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낮은 유권자의 지지율로 당선됐기 때문이다. 또 당선 후에는 특검의 조사를 받는 수모를 겪었다. 특검은 면죄부를 주었지만 좋지 않은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신뢰’를 갖지 못한 정권은 처음부터 바람이 잘 날이 없었다. 인수위원회의 미숙과 오만, 각료와 청와대 수석들의 연이은 낙마 등 악재가 꼬리를 물었다. 와중에도 이 대통령은 미국 방문을 서둘렀다. 그리고 촛불시위가 서울의 밤을 밝혔고, 대통령은 두 차례나 사과하는 수모를 겪었다. 더 중요한 일은 이 대통령의 사과는 단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방책이었음이 얼마 후에 밝혀진 것이다. 시위에 참여했던 유모차 엄마들에 대한 수사, 그리고 MBC PD 수첩팀에 대한 수사는 대통령의 사과가 단지 말뿐이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대통령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란 인식이 한층 강하게 각인되었음은 물론이다.
‘실패’가 예정된 정권
나는 이명박 정권의 ‘실패’는 정해진 것이나, 성급한 미국 쇠고기 수입재개 란 자충수(自充手) 때문에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보기보다 훨씬 취약하다. 한나라당의 근거지인 대구-경북은 원래 박근혜 전 대표를 선호하기 때문에 비록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열렬한 지지가 아니었다. 수도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지지를 많이 얻은 것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반감과 환멸에 기인했던 것이지, 적극적 지지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
촛불 사태 이후 대통령과 그 측근은 더 이상 ‘국민이해’, ‘신뢰’ 같은 데에 대한 관심을 접고, ‘마이 웨이’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해 오고 있다. 대통령은 중간층의 지지를 확보하기보다는 소수의 단단한 지지층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국민을 분열시켜 지지층을 다졌던 노무현 대통령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대통령은 권한위임에 대단히 인색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촛불 사태 이후 이 대통령은 말을 아끼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말까지 의도적으로 고약한 말을 해서 반대세력의 저항을 불러 일으켜 몰락을 자초했다. 반면 초기에 연이은 실언(失言)으로 곤혹을 치른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 사태 후로는 말을 아끼고 있다.
실언을 하는 것보다는 말을 아끼는 것이 좋지만, 질문과 답변이 오고가는 진솔한 기자회견이 없는 대통령은 소통을 포기한 대통령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이 말이 없는 틈을 당대표와 원내대표 등이 파고들어 이들의 말이 언론을 연일 장식하고 있어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를 열고 있다. 이들이 연일 뱉어 놓은 말에 따라 대북정책, 경제정책 등 주요 정책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으로 보이고 있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거품 경제’에 대한 맹신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정책은 이념지향적이라서 잘되었던 잘못되었던 지표가 있었다. 그래서 말썽도 많았지만 여하튼 노무현 대통령은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의 임기 중 전세계가 유동성 장세를 보이면서 ‘거품 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해 종부세 등 고단위 조세정책을 실시했지만 한편으로는 저금리 정책을 유지해서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지 못했다. 뒤늦게 주택대출을 규제했지만 그나마 불완전했을 뿐더러 이미 고삐가 풀려 버린 후였다.
대선 후보로서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면서, 대운하 같은 건설업 부양을 방안으로 제시했다. “운하를 건설하면 국운이 융성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명박 대통령은 독일의 라인-마인-도나우 운하를 방문하기도 했다. ‘주가 3000의 국민성공시대’와 대운하 공약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명박 대통령은 세계경제가 무한한 성장을 할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보 시절 이명박 대통령은 중동의 토후(土侯)국가 두바이를 방문해서 국왕을 만났다. 대통령 취임 후 1년 동안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등이 자주 언급한 모범적 사례는 바로 두바이였다. 그러나 지난 가을 세계 경제의 거품은 드디어 파열하고 말았다. 라인-마인-도나우 운하는 적자투성이의 바벨탑 같은 존재이고, 두바이는 부도 위기에 몰리고 있음이 알려졌다. 정권의 모델이 붕괴한 것이다.
‘실용’이란 환상의 붕괴
이명박 정권의 위기는 바로 ‘실용’이란 환상의 붕괴를 의미한다. 집권세력을 향한 냉소적 적대는 위험한 수준에 있고, 정권은 경찰과 검찰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대책이 있다는 말인가 ? 나는 거의 없다고 본다.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권이 위기에 처하면 대통령은 화합형 국무총리를 임명해서 민심을 수습해 온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하의 국무총리는 철저한 대독(代讀)총리에 불과하다. 국정을 통할하고 조정하는 총리로서의 최소한의 기능도 포기해 버린 껍데기뿐인 총리다. 모든 권력과 권한은 청와대에서 나오고, 실제 권력은 소수의 측근들에 의해 행사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직접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중용하지 않고, 모든 결정이 청와대에서 나오는 통치에 대해 사람들은 질려 버렸다.
그렇다고 집권세력이 견고한 것도 아니다. 집권세력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비화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집권 세력 내부의 견제와 갈등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이(親李)와 친박(親朴)으로 갈라진 한나라당은 ‘두나라당’이 된 형상이다. 이런 와중에도 정권은 ‘법치’를 내세우고 있으나, ‘신뢰’를 상실한 정권이 휘두르는 ‘법치’를 진정한 법치로 생각하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정권은 모든 것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해치우고 있다. 사업성이 없다고 판정을 내렸던 경인운하를 서둘러 착공할 계획이며, 정권이 몇 번씩 바뀌어도 안보상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던 잠실 제2롯데에 허가를 내주었다. 4대강 정비사업을 하기 위한 환경영향평가 등 제반 절차도 서둘고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런 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진솔하게 받아 드릴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업을 승인함에 있어 정부는 국민설득 절차를 아예 생략해 버렸다.
다음 정권에 주는 교훈
이 정권이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충고나 고언(苦言)을 하는 것은 괜한 일이다. 이 정권의 실패를 거울삼아 차기 대통령이 나라를 바로 세워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이 정권의 실패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
첫째로, 무엇보다 대통령은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신뢰’의 토대는 ‘정직성’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정직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할 것이다.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대통령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국민과 소통할 수 없다. 다음 대통령 선거에선 유권자들이 이러한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대통령은 ‘분열’을 조장하기보다는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물론 정치에는 여야가 있고, 또 집권세력에 대해선 반대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가급적 여야 합의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이 점에서 똑같이 실패했다. 셋째, 대통령은 많은 권한을 과감하게 위임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사람을 각료로 기용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자신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사람들을 주위에 두기보다는 다소간에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기용해서 각료와 참모들이 스스로 정책을 조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넷째, 국정은 결과 보다 오히려 절차와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있어 절차적 정의는 필수적이며, 바로 그 점에서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기업 논리와는 다르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명박 정권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점은 국무총리의 중요성이다. 우리 헌법상 국무총리의 지위는 애매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국무총리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때 나라는 편안했었고, 청와대가 이른바 ‘친정(親政)’을 했을 때에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대통령의 친정이 결국은 친인척과 측근의 발호(跋扈)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정부 각부처 장관들이 총리를 중심으로 일을 할 때에는 부처간의 이견과 갈등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청와대가 친정을 하던 때에는 모두들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국민은 정직한 대통령을 뽑고, 대통령은 덕망과 리더십을 갖춘 국무총리를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 이명박 정부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이다.
(c) 이상돈, 황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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