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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궁에 빠진 케네디 암살
작성일 : 2023-11-21 21:24조회 : 342


미궁에 빠진 케네디 암살


제임스 파일스는 자기가 케네디를 잔디 둔턱(grassy knoll)에서 저격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는 CIA의  데이비드 필립스(David Atlee Phillips 1922~1988)의 지시를 받았고, 존 로셀리는 샘 지앙카나와 CIA 사이의 연결책임자라고 말했다. 파일스는 케네디를 저격한 X-100 파이어볼 저격용 총도 필립스가 주었다고 진술했다. 파일스는 필립스가 루이지애나에서 벌였던 다른 일로 오스월드를 자기에게 소개해 주었고 오스월드도 필립스의 통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오스월드가 단독으로 케네디를 죽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리겠으나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CIA가 오스월드를 포섭했을 것이라는 추측하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스월드는 러시아어를 잘했다. 오스월드를 소련에서 만난 마리나는 오스월드가 러시아어를 잘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결혼해서 러시아어로 소통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마리나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오스월드는 해병대 근무 중에 러시아어를 공부했다고 하는데, 스페인어도 아닌 러시아어를 고등학교를 도중에 그만 둔 오스월드가 군 복무 중에 혼자 공부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스월드는 해병대에 있을 때 정보기관에 의해 집중적으로 러시아어를 배웠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오스월드는 일본에 있는 미 공군기지에 배속됐는데, U-2 첩보기를 운영하는 특별한 기지였다. 오스월드가 소련으로 망명한 경위도 그렇고 소련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경위도 통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스월드는 소련 당국의 조사를 받고 민스크에 있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소련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했다. 오스월드는 심경 변화를 일으켜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미국으로 돌아올 때 들어간 경비가 어디서 나왔는지도 의문이다. 오스월드는 자기가 미국에 돌아오면 환영을 받을 줄 알았으나 형님 가족 외에는 반겨준 사람이 없어서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댈러스로 돌아 온 오스월드를 챙겨 준 사람은 지질학자로 석유사업을 하는 조지 드 모렌실트(George de Mohrenschildt 1911~1977. 3. 29)였다. CIA 은익 요원으로 활동한 모렌실트는 1977년 3월 29일 플로리다 자택에서 총기로 자살했다. 찰스 니콜레티가 시카고에서 피살된 바로 그날이었다. 두 사람은 하원 암살조사위원회 소환을 앞두고 있었다.

1963년 3월 오스월드는 총기를 구입했고, 4월에 뉴올리언스로 이사를 갔다. 뉴올리언스에서 오스월드는 이모부와 가까이 지내는데, 오스월드의 이모부는 칼로스 마르셀로의 조직원이었다. 뉴올리언스에서 오스월드는 CIA와 협력을 하는 가이 배니스터 및 데이비드 페리에게 포섭되어 가까이 지낸다. (이 부분은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에 나온다.) 데이비드 페리는 뉴올리언스 마피아 보스인 칼로스 마르셀로의 측근이었다. 뉴올리언스에서 오스월드는 친(親)카스트로 활동을 하고 멕시코시티에 가서 소련과 쿠바 비자를 신청하지만 실패하고 다시 댈러스로 돌아온다. 오스월드의 이런 활동은 케네디 암살의 배후를 쿠바로 생각하게 하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칼로스 마르셀로가 오스월드를 '희생양(patsy)'으로 삼기 위해 이런 과정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제임스 파일스는 이런 말도 했다. 오스월드는 총을 교과서보관소에 가져다 놓는 역할을 부여 받았을 것 같으며, 케네디 암살에 대해선 몰랐다는 것이다. 제임스 파일스는 댈러스에 파견된 저격수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신참이었기 때문에 존 로셀리와 찰스 니콜레티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오스월드를 살해하게 되는 잭 루비는 칼로스 마르셀로의 댈러스 조직원으로 누드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루비는 케네디 암살 계획을 알았으나 오스월드는 몰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루비는 마르셀로 조직 내에서 위치가 있으나 오스월드는 마르셀로가 희생양(patsy)으로 쓰기 위해 길러 놓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필립스는 1950년부터 1975년까지 CIA에서 일하면서 1954년 과테말라 좌익정권을 무너뜨린 군부 쿠데타를 현장에서 지휘했고, 1960년에는 쿠바를 침공하기 위한 작전을 기획하는 임무를 맡았다. 피그스 만 침공작전이 실패하자 케네디 형제는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비밀작전(몽구스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로 하고 필리핀과 베트남에서 활약했던 에드워드 랜스데일(Edward Lansdale 1908~1987) 대령을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랜스데일은 중남미 사정에 어두워서 결국 CIA의 중남미 전문가이고 정권 붕괴 작전의 귀재로 소문난 데이비드 필립스가 책임을 맡았다.

데이비드 필립스는 존 로셀리와 함께 마이애미의 쿠바 망명인사(exiles)로 카스트로 암살단을 조직하고 로셀리에게 카스트로 암살을 위탁했다. 하지만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케네디는 흐르시쵸프에게 터키에 있는 미군 미사일을 철수하고 쿠바에 대해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렇게 해서 카스트로 암살 작전은 중단됐고, 카스트로에게 카지노 호텔을 몰수당한 샘 지앙카나, 산토스 트라피칸트 등은 자신들의 재산을 회복할 가능성을 잃어 버렸다.

1963년 들어서 로버트 케네디는 마피아에 대한 수사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샘 지앙카나 등 마피아 보스들은 케네디한테 배신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마이애미에 근거를 둔 쿠바 망명객들도 케네디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피그스 만 침공 때에도 케네디의 변심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데이비드 필립스 등 CIA의 현장 요원들은 케네디를 비겁자(coward)이고 반역자(traitor)로 보게 됐다. 이렇게 해서 마피아, 쿠바 망명객 단체, 그리고 CIA 일부 세력이 케네디 암살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된다. 1977~79년간 활동했던 하원 암살조사위원회의 법률고문이던 로버트 블래키 교수는 케네디는 마피아와 CIA 내부의 이탈세력(rogue)에 의해 암살됐다고 보았다. 제임스 파일스의 증언은 블래키 교수가 1981년에 펴낸 <대통령 암살 계획>의 결론과 부합한다.

데이비드 필립스는 케네디 암살 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과 브라질에서 CIA 지부장을 지냈고, 1970년 칠레에서 공산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엔데가 집권할 가능성이 보이자 칠레로 파견됐다. 아엔데의 대통령 취임을 저지하기 위한 1970년 쿠데타 시도와 아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에 의한 1973년 쿠데타를 현지에서 지휘한 CIA 책임자가 데이비드 필립스로 알려져 있다. 칠레에 대한 1970년과 1973년 두 차례의 개입을 지시한 대통령 안보보좌관은 헨리 키신저였다. 데이비드 필립스는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25년 동안 CIA에서 최고의 비밀작전 전문가로 활동하고 1975년에 은퇴했으며 1988년에 사망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뒤쪽에 위치한 저격수에 의해 등과 머리를 맞았고, 앞쪽에 위치한 저격수에 의해 목과 두개골이 맞은 것이 된다. 뒤쪽에서 발사한 총탄 한발이 코넬리 주지사를 맞추었고 한발은 빗나가서 도로에서 퉁겨진 후 서있던 행인에게 찰과상을 입혔다. 따라서 4명의 저격수가 6초 동안에 총 6발을 발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교과서보관소 6층에서 실제로 저격을 한 사람은 존 로셀리 또는 다른 저격수일 것으로 본다. 오스월드는 12시 15분에 2층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고, 12시 31~32분에 2층에서 코카콜라를 들고 있었음이 목격됐다. 대통령을 암살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이다. 원래 시나리오에 의하면 오스월드는 경찰관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됐어야 하는데 그것을 실패해서 이틀 후 잭 루비가 직접 사살해 버린 것으로 해석한다.

피그스 만 침공이 실패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 책임을 CIA로 돌려서 앨런 덜레스(Allen Dulles 1893~1969) 국장, 리차드 비셀(Richard Bissell Jr. 1909~1994) 부국장, 찰스 캐벨(Charles Cabell 1903~1971) 부국장을 해임했다. 리차드 비셀은 동베를린에 지하통로를 뚫어서 동베를린 시민들을 서베를린으로 탈출시키고 동독 지휘부를 도청했던 냉전 시대의 영웅이었다. 찰스 캐벨은 2차 대전 때 유럽에서 폭격기 부대를 지휘한 공군 대장으로 CIA에서 U-2 첩보기 개발을 지휘했다. 자신의 실패를 CIA의 책임으로 돌리고 이런 간부들을 해임한데 대해 CIA 내부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피그스 만 침공 실패로 망신을 당한 케네디는 CIA 때문에 실패했다면서 “CIA를 천 개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케네디 자신이었다.

텍사스 출신인 찰스 캐벨의 아버지는 댈러스 시장을 지냈고, 그의 동생 얼 캐벨(Earle Cabell 1906~1975)은  1961~64년 동안 댈러스 시장을 지냈다. 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암살당할 당시 댈러스 시장이 케네디가 파면한 CIA 부국장의 동생이었다. 댈러스 경찰국장은 물론 댈러스 시장의 지휘 하에 있다. (얼 캐벨은 그 후 하원의원을 오래 지냈다.) 잭 루비에 의해 피살되기까지 오스월드는 댈러스 경찰국에 40시간 넘게 구금돼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오스월드를 심문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오스월드를 체포해서 탄약흔이 있는가를 파라핀 테스트로 검사했으나 네거티브로 나왔고, 오스월드에 대한 목격자 라인업도 편파적이었음이 나중에 확인됐다.

케네디 암살이 미궁(迷宮)에 빠져버린 중요한 원인은 범죄의 증거인 시신과 리무진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케네디 부검은 베데스다 해군 병원에서 대충 실시됐다. 케네디가 탔던 리무진은 가장 중요한 증거물인데, 깨끗하게 청소한 후 자동차 회사로 보내져서 완전히 개장(改裝)됐다. 이런 지시는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데, 당시 대통령은 텍사스 출신인 린든 존슨이었다.

사진 (1) : 데이비드 필립스과 앨런 덜레스.
사진 (2) : 리차드 비셀, 찰스 캐벨, 얼 캐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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